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외젠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

아리에시아 2015. 8. 15. 11:53

476년 로마가 함락되면서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만, 실제 정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로마가 함락되기 전 세기에, 로마 제국은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할되었는데, 서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땅을 중심으로 한 영역이고, 동로마 제국은 오늘날 그리스 땅을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제국이 분할될 때 로마 제국의 중요 유산은 대부분 동로마 제국으로 옮겨졌으며, 서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도 동로마 제국은 천여년 동안 명맥을 이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그리스어를 썼지만, 그 외의 문화적 유산 등은 로마 제국에서 이어받은 것이 많았으며, 본인들도 고대 로마 제국의 후예라고 여겼습니다. 로마 제국은 실질적으로 그리스 땅에서 그 명맥을 이어나갔지요. 이 동로마 제국이 비잔틴, 혹은 비잔티움이라 불리는 바로 그 나라입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리스 땅은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가 되지요. 오스만 투르크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겉으로는 그럭저럭 평온한 상태로 그리스 땅을 수백년간 지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장 겉으로 보기에 큰일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속속들이 평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 정책은 대략 "대놓고 반항하지 않는 한 탄압하지는 않는다" 정도로 요약되는데, 일반적인 의미로 탄압하지는 않았다고 한들 식민지배인 것인 변함없었고, 이것만으로는 식민지의 반발을 누르기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스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지배 체제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여러 번 있었고, 오스만 투르크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리스 통치의 고삐를 조이면, 그리스에서 투르크 반발 분위기가 더욱 강화되는 과정이 여러 번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유럽을 뒤흔든 민족주의와 자치권 운동 등이 그리스에도 넘어오면서, 오스만 투르크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은 그리스 독립을 부르짖는 목소리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1822년 1월, 그리스 독립선언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그리스 독립투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수백 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던 작은 나라 그리스의 무력은,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와 맞서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전성기를 한참 지난 상태였지만, 그리스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그리스 독립을 부르짖던 세력들은 이내 진압되었고, 오스만 투르크는 철저하게 응징합니다. 1822년에 키오스 섬에서 일어난 참극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1822년 키오스 섬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야말로 무고한 민중이 무력하게 학살당한 사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키오스 섬은 12만 명이 넘는 주민이 살던 그리스 섬이었습니다. 1822년 이 섬에서 수백 명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대대적인 저항 운동에 나섰는데, 오스만 투르크는 이 저항 시도를 간단히 진압합니다. 그리고 그 응징으로, 이 섬에 살던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근대 국가에서 흔히 그렇듯이, 오스만 투르크에서는 "반역사건"이 일어나면, 근거지가 된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것이 관례처럼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키오스 섬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투쟁의 일환이랍시고,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를 모욕하는 퍼포먼스도 벌였기 때문에, 오스만 투르크 측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지요. 아마 당시 오스만 투르크 군인들은 수백 명의 '반란분자'가 있다는 이유로 10만 명이 넘는 키오스 섬의 주민 대부분을 학살하고, 생존자는 노예로 만들면서도, 이것은 제국에 반항하는 자를 응징하는 풍습에 따르는 것이라고 여겼을 겁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다는 데 대한 죄책감 대신에요.

 

12만 명이 넘던 키오스 섬의 주민들 중, 이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사람은 2만 명 남짓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기록과 관련 연구를 통해 추산하기를, 학살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52000명 정도이며, 그리고 52000명 정도의 사람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2만 명 남짓의 생존자도 대부분은 키오스 섬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던 사람들이었으며, 1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살던 키오스 섬은 황무지같은 장소가 되어버립니다.

 

키오스 섬의 참극으로부터 2년이 지난 1824년,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이 비극을 소재로 그림 한 점을 그립니다. 바로 <키오스 섬의 학살>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키오스 섬의 학살을 영원히 기억되게 만들지요.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키오스 섬의 학살>입니다. 아카데미식 엄정한 규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혼란스럽고 난잡하고 정신없는 그림이라는 평을 그렸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인 면을 극대화시키는 작품이지요.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이 낭만주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유입니다.

 

 

키오스 섬의 학살은 그 자체로는 역사에 길이길이 회자될 만한 사건은 딱히 아니었습니다. 그리스 독립전쟁 내부적으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고, 오스만 투르크 내부에서는 흔한 '반란 시도를 진압한 뒤의 일처리'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으며, 당시 관점에서는 예전에도 여러 번 일어났던 일이 또 일어났다는 정도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5만 명 넘게 죽은 사건을 무덤덤하게 대하는 이런 반응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봐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20세기 이후로는 10만 명 단위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대학살이 여러 번 벌어졌고, 대놓고 사람을 대량학살하기 위한 무기도 여럿 개발되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키오스 섬의 비극은 무수한 비극의 하나 정도로만 비쳐집니다. 중요한 것은 무력하고 무구한 사람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는 것이지만, 워낙 그런 사건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어느새 덤덤해져버린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키오스 섬에서 일어난 학살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무참하게 학살당한 소시민의 이미지와 함께요. 이 작품은 비단 키오스 섬에서 학살당한 장면을 그린 것일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무수히 있었던 비슷한 사건들을 표상하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저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무기를 든 자에게 무력히 학살당한 사람이 이때까지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를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그림이 그려진 당대의 유럽 민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24년을 전후하여 유럽 민중들 사이에서는 키오스 섬의 대학살에 공분하며, 오스만 투르크를 물리치고 그리스를 독립시켜야 한다는 식의 의견이 널리 퍼지지요. 이를 두고 유럽 대중들이 <키오스 섬의 학살>을 감상한 뒤 충격받고 분노한 정서가, 저런 분위기를 주도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학살이 일어났을 때부터 2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그것도 저 작품이 발표된 직후에 키오스 섬 학살이 새삼스럽게 공분을 불러일으킨 것을 보면, 개연성이 충분한 추론입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유럽 열강이 그리스 독립전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이어졌으며, 유럽 열강은 합심해서 그리스 독립전쟁을 지원했고, 마침내 그리스를 오스만 투르크에서 독립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에는 오스만 투르크를 약화시킨다는 전략적 계산도 있었지만, "야만적인 전제 권력에 무참히 고통받는 그리스 민중을 구원해야 한다"라는 식의 대중 여론도 한 몫했던 것입니다.

 

 

<키오스 섬의 학살>에 대해 당시 유럽 대중이 보인 극한 반응은, 아무 잘못도 없이 무력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공분에 바탕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메시지'라는 것을 얼마나 선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반례이기도 합니다. 유럽 대중이 격분한 것은 어디까지나 키오스 섬 한 군데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이것은 유럽 문화의 요람을 외부 세력이 짓밟았다는 식의 지론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공분도, 그리스 민중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고통받고 있으니 해방시켜야 한다는 낭만주의적 감성에서 그쳤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당시 세르비아를 비롯한 다른 식민지에서도 비슷한 학살을 벌인 적 있고, 유럽 제국주의 국가도 규모는 덜할지언정 식민지를 만들고 유지하면서 학살 급의 사건도 여러 번 저질렀지만, <키오스 섬의 학살>을 보고 격분했던 대중들 중 그런 사건에도 격분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유럽 민중이 격분한 것은 그리스 영토의 차원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중들에게 그런 것을 알린 예술가나 언론인도 거의 없었지만, 설사 있었다고 해도, 키오스 섬의 학살과 식민지가 된 그리스의 처지에 공분했던 유럽 민중들이 그런 사건에 대해서도 "야만인들이 유럽 문명의 요람을 파괴하고 있다"만큼의 반응을 보였을지는 의문입니다. 애초에 당시 유럽 열강의 식민지 철학이란, 미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유럽 문명의 빛을 전파해주겠다는 쪽에 가까웠으니까요.

 

당시 유럽인들이 그리스 독립전쟁에 대해 느낀 감정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아마 이 작품처럼 될 겁니다. 들라크루아의 <미솔롱기온의 폐허 속에 선 그리스>입니다. 그리스를 아름다운 여인으로 형상화하여, 폐허 속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그리고, 배경에는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이 사태의 원흉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구도로 그려져 있지요. 이 작품 자체는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그려진 것이고, 작가인 들라크루아는 <키오스 섬의 학살>처럼 참극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작품을 그린 바 있듯이 최소한 무참한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 대중 중에서는, 저 그림을 표면적으로 해석한 수준에서만 그리스 독립운동을 바라본 경우가 상당했습니다. 이를테면 낭만적인 비극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지요. 그렇게 얄팍한 감정에 기반했기에, 역설적으로 그 정도의 얄팍함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그리스 지지 여론이 널리 퍼지는 촉매가 되기도 했지만요.

 

동기야 어쨌건 결과적으로 그리스는 유럽 열강이라는 든든한 우군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었지만, 저렇게 낭만적인 비극 정도로만 상황을 바라보고 이 사태에 개입한 유럽의 관점은, 훗날 독립한 그리스의 현실과 자주 충돌하며 혼란을 초래하는 계기로 작용했지요. 이것을 비현실적인 환상에 근거해 현실정책을 추진한 쪽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외부의 힘으로 독립한 데 대한 한계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