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위촉오 삼국시대 혹은 위진남북조 시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아리에시아 2015. 6. 13. 11:26

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중국 역사를 가르칠 때, 중국 왕조를 대개 은나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순으로 정리해서 가르칩니다. 통일 왕조는 저렇게 여덟 시기였다고 정리하며, 도중에 분열된 시기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가르치지요.

 

이 중 한나라와 수나라 사이에는 300년이 넘는 공백이 있습니다. 한나라가 망한 것은 220년, 수나라가 세워진 것은 581년이지요. 이 사이의 400년 가까운 시기를 통틀어, 역사학계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위나라+진나라+남북조시대라는 뜻으로요. 하지만 중국사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 않고, 역사교과서 등에서 개략적으로 정리할 때에는 그냥 한나라->남북조시대->수나라 통일 정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위나라와 진나라는 역사적으로 별다른 영향이나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이전의 시대와 달라진 것도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위나라의 역사적 업적은 구품관인제라는 관료제도를 도입했다는 것 정도인데, 구품관인제는 명망 있는 인재를 천거한다는 의도로 시작되었으나 이내 권세가의 자제들이 관직을 공식적으로 세습하고 한미한 집안 출신 인재의 등용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게 됩니다. 대놓고 명문가 출신만 천거하면서, 천거받지 않으면 벼슬길이 사실상 막히는 쪽으로 변질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는 팔왕의 난으로 내란이 일어나 혼란기를 불러온 것 외에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위진 중 진나라는 통일왕조이기는 했지만, 위나라는 통일왕조도 아니었습니다. 위나라와 독립적인 지방 세력이 여럿 있었거든요. 하지만 화북 지역 등 중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핵심 지역은 거의 모두 위나라가 차지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그냥 위나라가 주도했다는 식으로 서술해도 별 차이 없습니다.

 

 

위나라는 진나라에 멸망당했는데, 진나라는 위나라를 멸망시킨 지 15년 후 중국의 지방 세력을 모두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합니다. 하지만 중국을 통일한 지 30년 남짓 지났을 때 영가의 난이 일어나 진나라의 수도는 함락당하고, 진나라는 급히 천도합니다. 영가의 난 이전의 통일정권 진나라를 서진, 영가의 난 이후 비옥하던 땅은 거의 빼앗기고 영토가 반토막난 진나라를 동진이라 하는데, 동진도 이내 멸망해버렸습니다. 진나라는 별다른 업적도 역사적 족적도 남기지 않은 채 맥없이 멸망했고, 역사에 남긴 것은 황족들이 연이어 골육상쟁을 벌인 팔왕의 난과, 사치를 과시하기 위해 비단으로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장막을 세우는 등의 터무니없는 사치를 했다는 일화밖에 없었으며, 오히려 이후의 혼란한 시대가 도래하는 원인만 제공한 격이 되었습니다.

 

통일제국 진나라가 무너진 이후, 중국은 오랫동안 여러 세력이 할거합니다. 역사학에서는 이 상황을 남쪽 지역을 점유한 남조와 북쪽 지역을 점유한 북조로 분류합니다. 중국 남쪽 지역에서는 앞서 말한 동진이 백여 년간 존속하다가 멸망한 후 여섯 왕조가 연이어 들어섰는데, 이 때문에 남조 대신 육조시대라는 호칭을 쓰기도 합니다. 북조에서는 다섯 이민족이 열여섯 개의 나라를 세웠던 오호십육국을 비롯해, 수많은 왕조가 창궐하다시피 흥망을 거듭했습니다. 이렇게 남조와 북조로 분열된 시기가 200여년에 이르는데, 역사학계에는 이 시기를 남북조시대라고 합니다. 위진남북조시대라는 명칭에서의 남북조시대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왕조가 바로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궤멸당한 수나라입니다.

 

 

진나라로 통일되기 전, 위나라 시절에는 중국 역사에 세 명의 황제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한나라를 멸망시킨 위나라가 황제국을 선포하고, 그 뒤를 따라 지방세력이었던 촉나라와 오나라에서도 군주가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지요. 이 시대가 오늘날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다면, "중국에 황제가 세 명이었던 적이 있었대.", "그 중 하나는 환관의 양자의 손자고, 하나는 수백년 전 황족의 후손이기는 한데 소싯적 돗자리 짜던 사람이고, 나머지 하나는 출신가문의 권위가 개인 능력보다도 훨씬 중요하던 그 시절에 할아버지가 뭘 했는지도 별다른 기록이 없을 정도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대." 식의 깜짝상식 정도로 언급되는 정도로나 기억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나라 초기에 염립본이 그린<역대제왕도권>에 나오는, 세 명의 황제의 초상화입니다. 모두 상상화입니다. <역대제왕도권>에서 세 황제가 나오는 부분을 각각 하나로 이어붙여 편집한 이미지입니다. 왼쪽부터 위나라 초대 황제 조비, 오나라 초대 황제 손권, 촉나라 초대 황제 유비입니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따로 분류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고 있을 정도로 역사학적 의의가 희박한 이 세 황제 시대는, 훗날 중국 역사를 통틀어 일반인에게 가장 유명해진 시대가 됩니다. 바로 천여 년 후 등장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덕분이지요.

 

중국 상서성에 세워진 나관중의 동상입니다. 좌대에 1330-1400년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숫자는 나관중의 생몰년을 의미합니다. 1400년에 사망한 기록은 있는데, 몇 년에 태어났는지는 불확실하나, 1330년 즈음으로 추정되어 있습니다. 출생지도 불확실한데, 이 동상이 세워진 상서성은 나관중의 출생지로 추측되는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어린이용 문학전집 등에 자주 수록되는 <삼국지>의 원전이 바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입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의형제 이야기, 제갈공명의 삼고초려 등은 거의 속담처럼 인용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 외에 적벽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치열하고 장대한 전투와 감동적인 일화 등도 한국에서 굉장히 유명한데, 바로 이 <삼국지연의>가 그 출전이 되는 것입니다.

 

<삼국지연의>를 원전으로 한 <삼국지>가 유명해지면서, 이 시대는 중국 역사 중에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할 시대가 되었습니다.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기에 이내 잊혀졌을 여러 역사적 인물과 역사적 사건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 중에도, <삼국지 연의>와 관련된 장소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실제 역사적 사적은 말할 것도 없고, <삼국지연의>에서 창작한 일화를 재현한 관광지도 많습니다. 삼국지의 인물이나 일화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거나, 관련이 있다고 추측되는 곳이기만 해도, 동상이나 기념물이 거의 빠짐없이 세워져 있지요.

 

그리고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 세 나라가 대결하는 이야기가 유명해지면서, 위진남북조라는 학술명칭 대신 위촉오 삼국시대라는 명칭이 훨씬 더 자주 쓰이게 됩니다. 진나라도 <삼국지> 결말에서 삼국지 시대에 삼국을 통일한 나라라는 식으로 알게 된 경우가 많고요.

 

위나라의 수도였던 허창 지역에 세워진 위무제의 동상입니다. 사진 출처는 아주경제신문에서 연재된 <걸어서 삼국지 기행> 35편입니다. 위무제는 위나라 초대 황제 조비의 아버지이자, 위촉오 삼국시대의 위나라를 이끌었던 조조로서, 아들 조비가 위나라 초대 황제가 된 이후 무제로 추증되었습니다. 본인이 황제가 즉위한 적 없기 때문인지, <역대황제도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웬만한 삼국지 인물보다 훨씬 유명한 인물입니다. 조조와 유비의 대결 구도는 <삼국지연의>의 중심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묘사됩니다. 허창 지역에는 조조를 기념하는 '위무제광장'이 건립되어 있으며, 위 사진의 조조 동상을 비롯한 여러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의 모든 것을 혼자서 창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역사서와 다른 내용도 민간설화 등에서 차용한 부분이 많지요. 관우 신앙 등은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쓰기 전에도, 민간 신앙 등으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관중이 종합하지 않았다면, 이것들은 중국의 잡다한 민간설화 정도의 비중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2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중국 역사와 역사적 인물들이 중국 밖에서도 이토록 유명해진 것은, 오로지 나관중의 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유럽의 아서왕 전설처럼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는 민간설화를 종합해 문화적 컨텐츠로 가공하는 모범사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런 문화적 컨텐츠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지도 아울러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