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잉글랜드의 헤이스팅스 평원에서 훗날 헤이스팅스 전투라 불릴 일대 결전이 일어납니다. 잉글랜드의 국왕이던 에드워드가 자녀 없이 죽자 계승자를 주장하는 세력이 난립했는데, 그 중 앵글로색슨 족의 해럴드와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지요. 이 전투에서 해럴드는 전사했고, 윌리엄이 승리하여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합니다. 윌리엄 1세는 역사에서 정복왕 윌리엄이라 불리게 되었고,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조의 시조가 됩니다.
이 헤이스팅스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주요 분기점으로 손꼽힙니다. 윌리엄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큰 땅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이었고, 프랑스의 대영주가 잉글랜드 국왕을 겸하게 된 것이지요. 이후 수백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영어는 하층민이나 쓰는 언어가 되었고, 잉글랜드 지배층들은 프랑스어를 쓰고 프랑스식 문화를 향유하게 됩니다.
정복왕 윌리엄, 윌리엄 1세가 만든 인구조사서인 '둠즈데이 북'입니다. 잉글랜드 최초의 인구조사 기록이며, 당시 인구 현황 및 재산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잉글랜드 밖의 세계사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잉글랜드는 오랫동안 세계 역사의 변방이었고, 사실상 외따로 움직였지요. 잉글랜드가 이후 세계역사에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은 300여년이 흐른 백년 전쟁 때부터입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백여 년에 걸쳐 치열하게 싸웠고, 잔 다르크가 출현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던 그 백년 전쟁입니다. 백년전쟁 이전의 잉글랜드 국왕 중 세계사 서술에서 이름을 보이는 사람은, 십자군 참전으로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한 그 동생 존 왕 정도입니다. 그나마도 로빈훗 전설 덕분에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많을 듯합니다.
하지만 중세풍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헤이스팅스 전투는 잉글랜드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는 보았을 전투이기도 합니다. 바로 '바이외 태피스트리' 덕분입니다.
윌리엄 1세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70미터 길이에 이르는 두루마리가 만들어집니다. 이 두루마리는 천으로 만들어지고 수를 놓아 형상을 새겼으며, 바이외 태피스트리라 불리게 됩니다. 중세 자수의 대표작이자, 대형 자수 작품이 현존하는 아주 드문 사례인지라, 자수품의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문화재입니다.
윌리엄 1세의 왕비인 마틸다 왕비가 이 자수 두루마리를 수놓았다는 전설도 있습니다만, 자수는 여자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이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마틸다 왕비가 이 태피스트리를 만들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으니까요.
바이와 태피스트리의 한 장면. 전사들이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입니다. 중세풍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그림풍을 한 번쯤은 접했을 겁니다. 중세풍 미술을 묘사할 때 자주 차용되기도 하지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혜성이 나타난 사건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당시에는 혜성이 자연현상이 아닌 하늘의 징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 등에 영향을 미칠 때가 많았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이 혜성이 나타난 것을 잉글랜드 왕좌에 있던 해롤드가 패배하고, 도전자 윌리엄이 승리할 전조라고 여겼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이 혜성이 바로 핼리 혜성인데,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현존하는 유럽 미술품 중 핼리 혜성을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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