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200년경, 소아시아의 교통 요충지에 위치해 있던 한 도시국가가 전쟁 끝에 패배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이 일은 아마 고대사를 지엽적인 수준으로 치밀하게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회자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도시가 상당히 파괴되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에 다시 도시를 세우고 살아갔습니다. 그 장소에 거주하던 후대인 중 옛날에 전쟁에서 패배한 도시가 있었다는 것에 신경 쓰는 사람도, 구태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기원전 800년경 이 사건을 소재로 삼은 서사작품이 등장하면서, 명멸한 수많은 도시국가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그 도시의 이름은 인류 문화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며, 나아가 고고학 역사의 초기에 큰 영향을 준 존재가 됩니다. 그 도시의 이름은 트로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쓴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노래했던 바로 그 트로이입니다.
호메로스 개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생몰연도도 불확실하며, 작품의 창작시기도 불확실합니다. 기원전 9세기경에 활동했고, <일리아드>가 쓰여진 것은 기원전 850년경이라고 추측되기는 합니다만, 증거나 자료는 사실상 없고 정황증거에 끼워맞춘 것에 가깝습니다. 호메로스에 대한 전설도 빈약하기 그지없어서, 장님으로 알려져 있다는 이야기 정도가 고작입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호메로스 조각상입니다. 호메로스가 죽은 뒤 수백년이 지났을 때 만들어진 작품이므로 호메로스의 실제 얼굴과는 무관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지만, 사람들이 호메로스에 대해 떠올리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거의 이 조각상의 모습입니다. 근대 이후 유럽 미술작품에서 호메로스를 묘사할 때에는, 이 조각상과 흡사한 외모에 전설을 따라 장님인 모습으로 그려낼 때가 많습니다.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파리스의 황금 사과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태어나면서 나라를 멸망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내려져 버림받지만, 목동이 버려진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키우게 됩니다. 한편 여신 테티스와 인간 남자 펠레우스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데,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가 결혼식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 사과를 던집니다. 최고신 제우스의 아내이자 최고의 여신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서로 이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고, 여차저차 목동으로 살고 있던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기게 됩니다.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자신을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는다면 자신이 주관하는 영역과 연관된 보상을 주겠다고 제의합니다. 헤라는 권력과 재산을 주겠다고, 아테나는 지혜를 주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고,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지요. 그리고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줍니다. 이것이 바로 '파리스의 심판' 이야기입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1636년 작품, <파리스의 심판>입니다. 파리스의 심판 이야기를 다룬 그림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였습니다. 아프로디테는 신의 권능으로 헬레네의 마음을 조종하다시피 하여, 헬레네가 파리스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헬레네는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헬레네의 남편이자 스파르타 국왕은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미케네 국왕의 동생이었고, 미케네 국왕 아가멤논은 전 그리스 군대를 소집해 트로이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 이어집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 최고의 영웅은 아킬레우스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앞서 말한 여신 테티스와 인간 남편 펠레우스의 아들로서, 무기에 상처를 입지 않는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킬레우스가 태어났을 때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저승을 흐르는 스틱스 강에 몸을 담구게 했는데, 스틱스 강에 닿은 부분은 상처를 입지 않는 강철같은 육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틱스 강물에 적실 때 발뒤꿈치를 잡고 물에 담갔기 때문에 뒤꿈치 부분은 인간의 육체 그대로의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뒤꿈치는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고, 오늘날 강인한 존재의 결정적인 약점을 뜻하는'아킬레스건'이라는 표현의 시초가 됩니다.
전쟁이 10년째 되던 해,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은 서로 불화를 빚고 있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가장 공이 많은 자신을 부당하게 무시한다고 생각했고, 아가멤논은 일개 왕자가 그리스 최강대국의 국왕이자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인 자신에게 건방지게 행동한다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불화가 심해지자 결국 아킬레우스는 그리스군을 위해 트로이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며 칩거해버리지만, 아킬레우스의 사촌이자 친우인 파트로클로스가 그리스군 최고 영웅인 헥토르에 의해 전사하자 다시 전장에 나가게 됩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원한을 갚겠다며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끌고 다니는 등 험하게 취급합니다. 그러자 헥토르의 아버지인 트로이 국왕 프리아모스는 위헙을 무릅쓰고 혈혈단신 홀몸으로 아킬레우스를 찾아와 헥토르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시신을 돌려달라 하고, 감명 받은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고 트로이에서는 헥토르의 장례식을 치릅니다.
트로이의 기둥 같은 존재였던 헥토르가 죽자 트로이의 패색은 짙어집니다. 하지만 파리스가 화살로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는 뚫는 데 성공하여, 아킬레우스가 사망하자, 상황은 반전됩니다. 그리스 그리스에서는 이타카 국왕 오디세우스가 목마 계략을 짭니다. 철수하는 척 하면서 목마를 하나 남겨두고, 이 목마가 신에게 바치는 봉헌물이라고 거짓말하면, 트로이 측에서 이 목마를 전리품 삼아 트로이 성 안으로 가지고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마 속에 그리스군 정예병이 숨어 있다가, 목마가 트로이 성벽 안에 들어가면 내부에서 트로이 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이 계획은 성공했고, 장장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그리스군이 승리하고 트로이는 멸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묘하게 위장하여 내부에 잠입하는 적을 의미하는 '트로이의 목마'라는 표현의 어원이 되었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약 50일 간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전설 속의 트로이 전쟁은 10년 동안 진행된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일리아드>에서는 그리스군이 트로이와 전쟁을 벌인 지 9년이 지났다고 언급하면서 시작되고, 지난 9년 동안의 일은 중간에 등장인물들이 회상하거나 대화할 때 언급하는 식으로 단편적으로 등장합니다. <일리아드> 이야기를 읽기 쉽게 정리한 판본에서는 대개 파리스의 심판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10년 동안 여러 영웅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계속되다가, 그리스군이 목마 속에 숨어서 트로이로 들어가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장면에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일리아드>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지 9년이 지나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그리스군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서로 반목을 빚는 장면에서 시작되고, 아킬레우스가 트로이군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헥토르를 죽인 뒤 헥토르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트로이 전쟁 이야기에서는 황금사과와 파리스의 심판, 아킬레스건, 트로이의 목마 등이 굉장히 유명한데, 막상 <일리아드>에서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황금 사과 이야기는 도중에 지나가듯 언급되는 정도가 고작이고, 아킬레스건이나 트로이의 목마는 <일리아드> 결말 이후의 이야기라서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트로이 전쟁을 다룬 다른 서사작품이나 신화 모음집 등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 이야기로는 <일리아드>가 워낙 독보적으로 유명한 덕에, 트로이 전쟁과 연관된 이야기는 모두 <일리아드>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자연히 많아졌습니다. 한 술 더 떠서 <일리아드>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판본에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아예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관련 대목들을 모두 정리하는 것이 통례처럼 되었을 정도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그리스 서사 문학의 금자탑으로 불립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그리스 문명이 멸망한 뒤에도 잊혀져지 않았습니다. 라틴어가 강조되고 그리스어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도 않던 중세 유럽에서도 면면히 명맥을 이었고, 고대 그리스 문명을 유럽 문화의 근원으로 강조했던 르네상스와 근대 유럽에서는 인문교육의 출발점같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트로이라는 이름도 잊혀지지 않고 전수되었지요. 그런데 <일리아드>에 묘사된 신화 이야기가 워낙 유명해진 나머지,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 자체가 신화 속의 장소라는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19세기에 <일리아드>에 감명받은 한 사업가가 트로이를 발굴하겠다고 했을 때, 당시 학계에서는 몽상가처럼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하지만 그 사업가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결국 트로이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고, 근대 고고학 발굴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은 유물을 찾는답시고 유적을 파헤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19세기 고고학 기준으로도 상당히 거칠었으며, 오늘날 기준으로는 도굴 수준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하지만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를 실제로 발굴했다"는 이야기가 19세기의 고대사 인식에 큰 방향을 끼친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대중적 인식과 관심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후 미노아의 크노소스 궁전 등 고대유적 대규모 발굴사업이 연달아 진행되는 추진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트로이가 멸망할 때,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고 피난하는 트로이 장군 아이네이아스의 모습을 그린 판화입니다. 하인리히 슐리만이 어릴 적 책에서 이 모습을 묘사한 삽화를 보고 트로이를 발굴하겠다는 꿈을 키웠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 장군 아이네이아스는 가족과 함께 트로이가 함락될 때 무사히 피신하는 데 성공했고, 아이네이아스와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유랑하다 정착해서 알바 롱가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도시가 바로 고대 로마의 시초라고 합니다. 이 전설 자체는 고대 로마에서 그리스 신화의 유명한 인물을 자신들의 신화에 차용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만,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로마 3대 서사시로 불리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바로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 멸망 후 일행과 함께 유랑하다가, 고대 로마의 시초가 되는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트로이'가 있던 곳에는 모두 아홉 겹의 도시가 있으며, 그 도시의 각각의 모습을 고고학적으로 복원한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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