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볼테르의 <캉디드>와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아리에시아 2015. 3. 7. 11:38

<캉디드>는 유명한 계몽주의자인 볼테르가 1759년 완성한 소설로, 계몽주의 계열 문학 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캉디드>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무조건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낙천적으로만 생각하는 주인공 캉디드가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는 일종의 모험담입니다.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처럼 행운과 불운이 엎치락 뒤치락하는 일을 연이어 겪은 끝에, 그럭저럭 해피 엔딩을 맞기는 하지요. 캉디드는 가는 곳마다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고는 하는데, 7년 전쟁 등 유럽의 역사적 격변에 휘말린 적도 여러 번입니다.

 

<캉디드> 내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으로 꼽히는 에피소드가 있으니, 바로 주인공 캉디드가 리스본 대지진에 휘말리는 이야기입니다. 캉디드가 리스본에 도착한 날이 바로 1755년 11월 1일이었던 것입니다. 캉디드와 일행은 어찌어찌 운 좋게 아수라장을 빠져 나올 수는 있었습니다만, <캉디드> 내에서도 손꼽히는 긴박하고 위험한 일을 겪었지요.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의 항구를 묘사한 당시 판화.

 

 

1755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만성절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현대 연구에 의하면, 당시 지진은 리히터 규모 8.5-9.0 정도였다고 합니다. 포르투갈 국왕 일가는 막내딸의 변덕을 달래주느라 일정을 깨고 리스본을 떠나 있었기에 천운으로 무사했지만, 그런 행운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건물들은 줄줄이 무너졌고, 건물이 무너지고 불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항구에도 거대한 쓰나미가 덮칩니다.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달했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집계하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은 "큰 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고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이 개발된다"라는 명제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 국왕은 대지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냐는 말에, "죽은 사람은 묻고 산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폼발 후작에게 대지진을 수습하는 총책임을 맡겼으며, 폼발 후작은 그 사명을 훌륭히 완수해냈습니다. 리스본은 1755년의 대지진이 다시 덮쳐도, 이전같은 비극은 방지할 수 있는 많은 장치를 갖춘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리스본 대지진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 리스본에는 4층 이상의 건축을 금지하고 내진성 설계라는 개념을 적용한 '가이올라'라는 건축공법으로 건물을 짓도록 했습니다. 또한 만약 집이 무너져 잔해가 길 위에 쌓인다고 해도 사람들이 대피할 길은 확보할 수 있도록, 마주보는 집 사이에 넓은 간격을 두고 집을 짓도록 했습니다. 리스본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7개의 대로는 18미터 폭으로 놓였고,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길도 최소한 12미터 너비를 확보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리스본은 많은 집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선 미로 같은 구조였고, 대지진 때 좁은 길을 빠져나가려다 길이 막히거나 좁은 길 위에서 무너지는 잔해에 깔려 사망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이올라'의 구조. 가이올라는 포르투갈어로 새장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건물의 벽에 나무로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구조의 X자 틀을 먼저 만든 뒤, 목재 틀 사이는 벽돌, 석재, 회 반죽 등으로 채우는 구조입니다.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 지질학 연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사건입니다. 리처드 험블린의 <테라 Terra: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 최초로 지진에 관한 객관적 진술을 수집하려 한 공식적인 시도'가 처음으로 행해진 곳이 바로 대지진 직후의 리스본이었던 것입니다. 포르투갈 내의 리스본 이외 다른 지역의 모든 교구의 성직자들에게, 지진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는지, 여진이 몇 번 느껴졌는지,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 등을 설문조사했으며, 설문조사 결과는 '분석 및 교차 참조되어, 지진 및 이에 동반되는 쓰나미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이끌어' 내는 데 이릅니다. 또한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포르투갈 리스본보다 정도는 덜할지언정 지진이 일어나고 피해가 생겼는데, 이런 정보도 서로 측정하고 교환하며 취합했습니다. 이처럼 리스본 대지진은 지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가 최초로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인이 쓴 <캉디드>에 리스본 대지진이 언급된다는 것은, 당대 유럽 지식인들이 이 대지진을 얼마나 중요한 사건으로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리스본은 대지진의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고, 대지진에 대비한 안전장치를 몇 겹씩 갖춘 도시로 재탄생했습니다. 볼테르가 <캉디드>를 썼을 때만 해도 당대 일어난 손꼽히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지만, 대지진의 상흔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적 있다는 역사적 사건도 더 이상 상기되지 않고 잊히게 되었습니다. <캉디드>가 아니었다면, 포르투갈 밖에서는 아예 언급될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건축공학이나 지진 연구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 알고 있다면, 아마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리스본이라는 도시의 역사에 엄청나게 해박하거나, 볼테르의 <캉디드>와 작품배경해설을 읽었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