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비제의 <카르멘 Carmen>은 오페라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인기 오페라입니다. '하바네라'는 오페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들어본 적은 있을 정도로 유명한 노래이며, 그 외에도 주옥 같은 음악으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카르멘>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대는 에스파냐의 세비야입니다. 남주인공 돈 호세는 나름대로 착실하게 할 일은 다하고 있는 군인으로, 지고지순한 약혼녀 미카엘라도 있습니다. 돈 호세는 어느 날 담배공장에서 난동을 피우다가 잡힌 카르멘이라는 집시 여공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카르멘이 돈 호세를 유혹하자, 돈 호세는 자신도 모르게 카르멘을 풀어주고 맙니다. 돈 호세는 이 일로 영창에 갇히게 되지만, 영창에 갇힌 동안에도 내내 카르멘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풀려나자마자 카르멘을 찾아가 사랑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챙기지도 않고 카르멘만을 보다가, 돈 호세의 처지는 단단히 꼬여버립니다. 카르멘을 따라다니다가 군대에 제때 복귀하지 못해 졸지에 탈영병 신세가 되는가 하면, 카르멘이 무일푼으로 쫓기는 처지가 된 돈 호세를 위한답시고 마련해준 일거리가 밀수업이어서, 여기에다 추가로 범죄자 신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돈 호세는 카르멘을 사랑한답시고, 카르멘 옆에 계속 있을 수 있는 길을 택합니다.
한편 카르멘은 점점 돈 호세에게 마음이 떠나갔고, 에스카미요라는 투우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돈 호세는 카르멘의 마음을 되찾아오려고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카르멘은 끝까지 그를 거부하죠. 돈 호세가 카르멘을 붙잡으려고 하자, 카르멘은 자길 가게 놔두든가 죽이라고 하면서, 죽이는 한이 있어도 돈 호세가 자신을 차지할 수는 없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돈 호세는 그 말을 듣고, 결국 카르멘을 찔러죽이고 맙니다.
2012년 10월 20일,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입니다. 카르멘 역에 메조소프라노 케이트 올드리치, 돈 호세 역에 테너 장 피에르 퓌흐랑입니다.
'하바네라'는 1부 동영상의 21분 경에 시작합니다.
오페라 <카르멘>은세비야에 있는 담배공장 주변의 광장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담배공장의 분위기가 영 이상합니다. 좋게 말해야 어수선하고 산만하며, 오페라 내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무질서하다는 것에 가깝죠. 심지어 한 여공이 일하는 도중 싸움이 붙어서 공장에서 뛰어나와서, 사람들이 기겁하기도 합니다.
<카르멘>의 초반부는 실존했던 세비야 담배공장을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카르멘>의 무대가 된 세비야 담배공장의 현재 모습입니다. 현재는 세비야 대학 건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세비야 담배공장은 1771년 에스파냐 정부에 의해 세워진 왕립 시설로서, 19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담배공장이었습니다. 에스파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지배했는데, 아메리카 대륙의 각종 문물이 에스파냐로 쏟아지게 됩니다. 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쏟아져 나온 막대한 금을 비롯해, 초콜릿, 감자 등의 작물도 전래되었지요. 그리고 담배도 이 때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와, 본격적으로 유럽에 소개됩니다. 그리고 아메리카를 지배한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담배 제조업이 성행하게 되지요. <카르멘>의 카르멘이 에스파냐 세비야에 있는 담배공장에서 일한다는 설정은, 적어도 아무 개연성 없이 적당히 생각해 만든 설정은 아니었던 겁니다.
하지만 특정 제품이 인기 있다고 해서, 그 제품을 직접 만드는 직업의 사회적인 인식 자체가 좋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담배는 더욱 심했지요. <카르멘>이 초연된 19세기 중후반 경, 일자리로서 담배공장의 평판은 유난히 나빴습니다. 담배잎을 찌고 포장하기 위해서는 공장 내부의 온도를 높게 유지해야 했는데, 때문에 긴 옷을 입고서는 도저히 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얇고 짧은 옷차림으로 담배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는데, 여성이 발목을 노출하는 것조차 망측하게 여기던 http://blog.daum.net/ariesia/22 19세기에, 여자가 팔다리가 노출되는 옷차림을 한다는 것은 수치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일이었지요. 이 시기에는 일한다는 것을 천박하게 여겼고, 특히 여성이 일한다는 것은 남자 가족의 무능력함을 입증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처지가 아닌 이상 여성이 일하는 경우는 전무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으레 그렇듯이, 별다른 돈도 배경도 없는 여성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조건이 극히 열악한 것밖에 없었지요.
카르멘 초반부에 카르멘이 동료여공에게 칼부림하다가 공장에서 뛰쳐나오고, 주변 사람들이 사람들이 기겁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의 상황도 이런 작업환경과 연관이 깊습니다. 오페라만 보면 사람이 갑자기 뛰쳐나오니까 놀란 것으로만 보이기 쉬운데, 오페라 내에서는 저런 얇고 짧은 옷차림으로 일하다가 그 옷차림 그대로 거리로 뛰쳐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기겁했을 공산이 크지요. 19세기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았을 때의 당혹한 기분은, 현대인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을 보았을 때의 기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옷차림으로 일해야만 하는 담배공장의 평판도 덩달아 나빠졌고요.
담배 공장의 업무 자체는 여성의 체력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고, 여성 인력이 남성 인력보다 훨씬 쌌기에, 담배 공장에서는 여성 인력을 많이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담배공장에는 특히 평판이 나쁘거나 조건이 좋은 일자리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처지의 여성들이 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담배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더욱 나쁘게 만드는 결과를 낳지요. 오페라 내에서 예를 들면, <카르멘> 도입부에서 담배공장 여공들은 대놓고 공장 주변의 군인들과 노닥거리는데, 19세기 관점에서 이런 모습은 여자가 취하기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경박한 행동으로 비쳤을 행동입니다. 하지만 당대 관객들은,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라면 충분히 저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 장면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창작물인 <카르멘>은 당시 담배 공장의 여공들이 정말로 툭하면 담배를 피우고 기회만 되면 군인 남자들과 노닥거렸다는 증거로는 부족하지만, 그 창작물을 향유하던 대중계층이 그런 장면이 충분히 개연성 있을 것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보여줍니다.
여기에 담배공장 여공들 중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인식도 더해졌습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담배란 여성에게는 해악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남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점잖고 예의바른 행동이지만,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무례하고 건방지며 '여성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졌지요. 담배가 사람 몸에 해롭다는 것이 밝혀지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이런 풍조는 건강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이른바 조신하고 예의바른 여자는 모름지기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의 관념이었던 것입니다. <카르멘>이 초연된 19세기에도, 이런 풍조는 당연히 여전했고요. 그런데 담배공장에서 일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여성의 이미지가 널리 퍼졌다면, 그리고 담배공장이 그런 여자들이 일하는 곳으로 여겨졌다면, 당시 분위기나 이미지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집시는 19세기 유럽에서 대놓고 경멸받던 존재였는데, 카르멘이 집시면서 담배공장에서 일하다가 무려 동료끼리 칼부림을 해서 된다는 초반 스토리는 당시 역사에서는 사회적인 함의가 깔려 있습니다. 웬만한 집에서는 집시라면 심부름꾼으로 삼기에도 꺼리던 상황이었는데, 담배공장에서는 그런 집시로라도 일손을 충당해야 했고, 유난히 질이 낮은 인력이 주로 모이다보니 필연적으로 사건사고가 그만큼 더 잦았던 상황이 반영되어 있지요. 초반에 여공들이 나왔을 때부터 분위기가 산만하고 어수선하더니, 당대 관념으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노출된 옷차림으로 일하고, 종국에는 오페라 내에서 칼부림 사건까지 터지는 바람에 그 옷차림으로 피를 흘리면서 사람이 뛰쳐나오는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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