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반에는 초월적인 기교를 자랑하는, 일명 '벨칸토 오페라'가 유행이었습니다. 벨칸토란 '아름다운 목소리'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베르디의 작품이 인기를 끌게 된 이후로는 거의 잊혔습니다. 가수의 노래실력을 과시하듯이 드러내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극의 드라마적 완성도나 캐릭터 등은 취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디나 베르디 이후의 극적인 작품에 익숙한 관점에서는, 벨칸토 오페라는 느닷없이 노래부르는 계기를 만들려고 황당한 전개를 터뜨리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던 것입니다. 벨칸토 오페라는 거의 백여년간 묻혀있다가, 마리아 칼라스가 벨칸토 오페라를 부활시킨 이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레퍼토리가 됩니다. 유명한 벨칸토 오페라로는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벨리니의 <노르마> 등이 있습니다.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는 벨칸토 오페라의 특성이 집약된 작품입니다. 대본은 엉성하다 못해 구멍이 뻥뻥 뚫려 있을 정도로 빈약합니다. 특히 결말부에 이르면, "글쓰기 좋아하는 중고등학생을 데려다놔도, 이것보다는 짜임새 있는 결말을 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음악은 너무나도 아름답지요.
글로리아 오페라단이 2011년 공연한 <청교도>입니다. kbs중계석에서 방영된 영상으로,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지휘자는 스테파노 세게도니, 여주인공 엘비라 역에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란자, 남주인공 아르투로 역에 테너 잔 루카 파졸리니, 리카르도 역에 바리톤 카를로 모리니입니다.
줄거리가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내용을 모르고 음악만 듣는 게 감상하는 데에는 차라리 나을 작품이라지만, 줄거리 설명은 해야겠지요. <청교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배경은 잉글랜드의 도시 플리머스입니다. 여주인공 엘비라와 남주인공 아르투로는 결혼을 앞둔 사이입니다. 그런데 아르투로는 우연히 엔리케타 왕비가 연금된 것을 알게 되자, 왕비를 돕는답시고 왕비를 피신시키기위해 동행합니다. 새신부 엘비라는 졸지에 새신랑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미쳐버립니다. 낭만주의 시대 벨칸토 오페라에 흔히 나오는 http://blog.daum.net/ariesia/12 일명 '광란의 장면'을 집어넣기 위해, 웬만하면 충격 좀 받을 일에 여주인공이 미쳐버렸다는 전개가 나오는 것이지요.
한편 아르투로에게는 연금된 왕비를 탈출시켰다고, 사형 선고가 내려집니다. 하지만 엘비라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르투로는 엘비라를 보기 위해, 잡히면 죽게 될 것을 알고서도 엘비라를 만나러 오지요. 광란의 장면 속에서 미쳐버린 엘비라는 미친 와중에서도 아르투로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마침 제정신을 찾으면서 아르투로와 엘비라는 재회하게 됩니다.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아르투로를 발견하고, 아르투로의 사형이 당장 집행될 상황에 놓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스튜어트 가가 멸망된 것을 기념하여 대사면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도착하고, 아르투로는 면되어 해피엔딩을 맞게 됩니다.
<청교도>에서, 남주인공 아르투로는 '엔리케타 왕비'를 돕기 위해 결혼식을 앞둔 새신랑이 다른 여자와 행방불명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이 엔리케타 왕비는 실존인물입니다.
오페라에서 '엔리케타 왕비'로 등장하는 왕비의 실제 초상화입니다. 엔리케타는 이탈리아어 발음 이름입니다. 프랑스 공주로서 프랑스식 이름은 앙리에타 마리, 영국 왕비가 된 뒤 영국식으로는 헨리에타 마리아로 불립니다.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남편인 찰스 1세의 초상화입니다. 오페라 내에서는 이탈리아식 발음인 '카를로 왕'으로 나오지요.
'엔리케타 왕비'가 영국 왕비라는 걸 생각하면, 오페라의 설정이 좀 황당하게 보입니다. 다른 나라의 왕비를 포로로 잡았다거나 하는 경우도 아니고, 영국의 왕비가 자기 나라의 성에 감금된 채로 등장하다니! 국왕이 사이가 좋지 않은 왕비를 시골의 성 등에 유폐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경우도 아니었지요.
<청교도>의 배경은 CIvl War 시기의 잉글랜드입니다. 예전에는 청교도 혁명이라는 표현이 쓰였으며, 최근에는 영국 내전이라는 표기도 널리 통용되고 있는 그 사건입니다.
영국 국왕 찰스 1세(1600~1649)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습니다. 왕권신수설이란 왕권은 신이 부여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왕권은 그만큼 절대적이고 신성한 것이라는 논리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국왕의 절대왕권에 제동을 걸고자 했고, 찰스 1세와 점차 대립하는 사이가 됩니다. 왕권신수설 신봉자였던 찰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하거나, 의회를 사실상 일방적으로 폐쇄해버리거나, 의회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의회에서 도움을 받고는 본인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등의 행동을 하면서도, 국왕으로서 국왕에게 대드는 세력에게 정당하게 대처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의회의 움직임도 더욱 강경해졌습니다.
국왕 찰스 1세와 의회의 대립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결국 찰스 1세를 따르는 왕당파와 의회를 따르는 의회파의 내전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이 바로 청교도 혁명/영국 내전입니다. 이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납니다. 오페라 <청교도>는 승리를 기념하여 대사면령이 내려지면서 해피엔딩이 되는데, 실제 역사와 맞춰보면 이 내전이 종식된 것을 기념하여 승리한 측에서 대사면했다는 설정입니다.
의회파가 승리한 1등 공신은 명실공히 군대를 지휘한 올리버 크롬웰이었는데, 크롬웰은 내전에서 승리한 뒤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 영국의 1인지가 됩니다.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입니다.
청교도 혁명/영국 내전은 국왕을 처형하고, 영국은 공화국이 된다고 선포하는 결말을 맞습니다. 찰스 1세의 가족은 외국에 망명했고, 영국은 공식적으로 국왕이 없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이제 영국의 집권자는 국왕이 아니라 선출된 대표자였고, 크롬웰이 그 첫번째를 차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크롬웰이 죽은 직후, 크롬웰이 세운 체제는 사라져버립니다. 크롬웰이 죽자마자 영국 의회에서 찰스 2세를 모셔와 새 국왕으로 세웠지요. 크롬웰은 청교도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 하에,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 원칙을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하고, 어긴 것이 있으면 가혹하게 처벌했지요. 놀이나 춤 등의 문화는 일절 금지되었고, 종교 활동도 더한층 엄격해졌습니다. 게다가 전쟁 등의 대회정책, 민생 등의 정책은 찰스 1세 시절에 비해 딱히 나아진 것도 없었고, 오히려 더욱 나빠졌다고 체감할 부분은 여럿 있었지요. 그처럼 인망을 잃은 결과, 크롬웰이 죽자 영국은 스스로 나서서 왕정을 복고하게 된 것입니다.
청교도 혁명/영국 내전을 겪은 영국은, 같은 왕정이어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됩니다. 의회의 영향력과 발언력이 강해졌고, 왕권신수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지요. 그리고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 시기에 명예 혁명이 일어났고, 명에 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본격적인 입헌군주국이 됩니다. 제임스 2세가 인망을 잃자, 제임스 2세를 축출하고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제임스 2세의 조카이자 메리의 남편이기도 한 오라녜 공 빌렘을 새 국왕으로 세웠는데, 이 두 왕이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고 국왕은 입헌군주가 되는 '권리장전'을 승인한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영국 입헌 군주 제도의 실질적인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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