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역사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과 19세기 모병 제도

아리에시아 2015. 6. 27. 11:56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은 가에타노 도니제티가 작곡하여 1832년 초연된 작품입니다. 오페라 전체를 통틀어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라는 아리아가 가장 유명한데, 이 아리아는 얼핏 서글픈 느낌마저 들 정도로 서정적이고 멜로디가 느린 노래입니다. 이 아리아만 듣는다면, 이 오페라 전체가 이렇게 진중할 정도로 느린 멜로디의 음악으로 채워져 있거나, 진지하고 비극적인 내용일 거라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묘약>은 이 아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음악이 활기차고 발랄한, 코미디 계열 작품입니다. 옛날 유럽의 문화적 풍토 같은 것을 몰라도 등장인물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어서, 오페라 입문용으로 자주 추천되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랑의 묘약>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남주인공 네모리노는 마을의 아가씨 아디나를 짝사랑합니다. 아디나는 네모리노가 사는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가씨로서, 가는 곳마다 아디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가득할 정도이고, 이 마을의 수비대장 역을 맡고 있는 장교 벨코레가 곧바로 청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게 표현해도 지극히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는 네모리노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대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둘카마라 박사라는 사람이 옵니다. 둘카마라는 만병통치약을 판다면서 요란하게 홍보하고, 많은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약을 삽니다. 그러자 네모리노는 혹시 사랑의 묘약도 있냐고 진지하게 묻고, 둘카마라는 비싼 값을 받고 사랑의 묘약이랍시고 포도주를 속여서 팝니다. 그리고 네모리노가 '사랑의 묘약'을 샀으니 아디나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막연히 안심하며 막상 아디나에게도 무심하게 그냥저냥 대하는데, 이러는 동안 일이 꼬이고 맙니다. 아디나는 사실 순박한 네모리노에게 은근히 마음이 있었는데, 네모리노가 자신에게 무심하게 대하자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나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홧김에 벨코레의 청혼을 수락한 것입니다.

 

네모리노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랑의 묘약'을 추가로 사려고 하지만, 네모리노에게는 이제 돈이 없습니다. 그러자 벨코레는 군인이 되기만 하면 즉시 돈이 지급된다고 말하고, 네모리노는 약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군인이 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맙니다. 그리고 아디나는 이 사실을 알고는, 군인이 되어 마을을 떠나게 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사랑을 얻고 싶어했다는 것에 감동합니다. 이 다음 장면에서,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나옵니다. 네모리노가 아디나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더없이 행복하다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한편 아디나는 위약금을 물고, 네모리노의 입대 계약을 취소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네모리노에게 이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면서, 서로 사랑 고백을 하고 커플이 되며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솔오페라단에서 2013년 4월 4일 공연된 <사랑의 묘약> 공연영상입니다. KBS 중계석에서 방영된 영상으로,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지휘자는 잔카를로 데 로렌조, 네모리노 역에 테너 전병호, 아디나 역에 소프라노 다니엘라 브루에라입니다. 이 영상의 1시간 31분 40초경부터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나옵니다.

 

 

<사랑의 묘약>은 19세기 초반 유럽 문화를 몰라도 얼마든지 중심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오페라지만, 군데 군데 당시 문화의 편린이 은근히 스며들어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오페라 첫 장면에서 여주인공 아디나는 또래의 마을 아가씨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책을 읽으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설을 이야기해줍니다.(http://blog.daum.net/ariesia/70 참조) 이 장면은 언뜻 보면 인기 있는 아가씨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니 또래 친구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처럼만 보이는데, 19세기 초 유럽 사회모습을 생각하면 약간 달리 보입니다. 19세기 초반 버젓이 장정된 책은 상당히 비싸서 웬만한 재력이 없으면 구입할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다가, 시골 사람들 중에서는 글읽기를 배우지 않은 경우도 많았거든요. 그러니 이 장면은 당시 시골에는 이래저래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런 사회환경에서 아디나는 웬만큼 부유한 집의 자제이자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여주인공 아디나가 첫등장하는 장면 역할을 하고 있지만요.

 

 

네모리노는 오페라 중반에서 군대에 들어가겠다는 계약서를 쓰면 나름 큰 돈을 준다는 말만 듣고 덜컥 입대 계약서에 서명하는데, 오페라에서는 네모리노의 순박함을 강조하는 코미디 요소이자 전개 장치로 쓰였지만, 이런 풍조도 당시 유럽의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 오페라가 초연되었던 1832년,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군대는 모병제로 운영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병제라는 것이 두서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시골 출신 장병들의 입대 동기에 대한 기록을 보면, 군대에 들어가면 곧바로 돈을 준다고 해서 입대한 경우, 군대에 들어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입대한 경우, 군인들이 멋진 군복을 입고 규율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군대를 동경하게 되어서 무작정 들어온 경우 등이 상당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는 오늘날로 치면 과장광고에 덜컥 넘어간 셈이었고, 첫번째의 경우에도 군대에 들어간 즉시 나름대로 큰 돈을 주는 경우가 많기는 했는데, 대부분은 몇 달치 봉급을 미리 가불해주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모병제라는 것이 이렇게 어중이떠중이가 일단 오면 마구잡이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오는 사람 모두 받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멋모르는 어중이떠중이를 그럴싸하게 군대로 유인하는 것이 주요 군인 충원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징집제 군대 수준이 모병제 군대 수준보다 훨씬 높았는데, 주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지요.

 

이런 식으로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모병제는 인력의 질을 먼저 검증하지 않고, 아무나 일단 데리고 와서 머릿수만 채우자는 식으로 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무기 수준으로는 지휘관만 제대로 훈련받고 교육받으면, 사병은 최소한의 훈련만 받아도 머릿수만 많으면 군대에서 훨씬 유리한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지휘관에게만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고, 사병은 일단 아무나 데려오는 식으로 충원되는 시스템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지요. 이런 풍토가 바뀌고, 사병도 일정 수준 이상 되는 사람을 받아들여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게 된 것은, 훗날 19세기 말부터 기관총을 비롯한 갖가지 무기가 개발되기 시작한 이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