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 Andrea Chénier>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전형적이고 진부한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고, 커플 중 여자 쪽을 짝사랑하면서 남자 쪽을 제거할 꿍꿍이를 꾸미는 라이벌 남성 캐릭터가 삼각관계 구도를 형성합니다. 라이벌 남자 쪽은 커플 중 남자 쪽을 제거할 계획을 꾸며서 무려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드는 데 성공하는데, 커플 중 여자 쪽은 자청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죽는 쪽을 택하지요.
줄거리만 놓고 보면 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지만, <안드레아 셰니에>는 이 클리셰를 1760년에 태어나 1794년에 죽은 한 시인의 일생에 대입했습니다. 커플 중 남자 쪽이 실존인물로 설정되어 있지요. 오페라에서 남주인공으로 삼은 실존인물의 이름은 앙드레 셰니에르라는 프랑스인으로, 이탈리아식 발음으로는 안드레아 셰니에가 됩니다. 그리고 이 설정을 통해,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는 강한 역사성을 띠게 됩니다. 앙드레 셰니에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 기간 동안에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면서 남주인공을 파멸시키는 라이벌 남자 쪽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 귀족 사회를 증오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에 뛰어들었다가 나름대로 출세한 하인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 오페라는 단순한 삼각관계 이야기를 넘어서, 프랑스 대혁명 중 공포정치 기간을 둘러싼 혼란을 주인공 일행의 중심 드라마와 엮어내고 있습니다.
<안드레아 셰니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설정상 등장인물들은 프랑스인입니다만, 오페라가 이탈리아어로 작곡되었으니 이탈리식 이름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오페라는 여주인공 막달레나 집에서 열린 무도회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무도회에서는 신분 낮은 자들은 비천하며 게으르고 가난하다면서 무시하는 내용의 대화가 오갑니다. 남주인공 안드레아 셰니에가 그 계층을 동정적이고 우호적으로 묘사한 시를 창작하자, 귀족들이 대놓고 웅성거리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무도회는 하인으로 일하는 제라르가 가난한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나, 이때까지 귀족들이 자신들을 착취했다는 내용의 일장연설을 하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제라르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조사할 권한이 있는 관료가 되었고, 남주인공 안드레아 셰니에와 여주인공 막달레나는 귀족 신분이 문제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남녀주인공은 재회하게 되지만, 재회의 기쁨은 잠시뿐, 안드레아는 제라르에게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제라르는 안드레아를 처형시키기 위해서, 터무니없는 핑계로 고소장을 작성합니다. 막달레나는 잡혀갈 것을 각오하고 제라르 앞에 스스로 나타나서 안드레아를 풀어달라고 주청하고, 제라르는 막달레나를 사랑해서 안드레아를 질투하고 파멸시키려 했다는 것을 실토합니다. 막달레나는 안드레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기꺼이 바치겠다고 말하고, 제라르는 그 태도에 감화되어 안드레아가 실제로는 무죄라는 것을 밝히려 합니다. 하지만 이미 재판에 넘겨진 뒤였고, 재판정에서는 빈약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하고 말지요. 그리고 막달레나는 안드레아 셰니에와 같은 수감실로 걸어들어가, 같이 처형당하는 운명을 자처하고, 두 명이 같이 처형대로 향하면서 오페라는 막을 내립니다.
KBS 중계석.150820.국립 오페라단 안드레아 셰니에-1 작성자 20161aaaa
KBS 중계석.150820.국립 오페라단 안드레아 셰니에.-2 작성자 20161aaaa
2015년 3월 12일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안드레아 셰니에> 영상입니다.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영상 제목을 클릭하면 영상이 뜹니다. 안드레아 셰니에 역에 테너 박성규, 막달레나 역에 소프라노 고현아, 제라르 역에 바리톤 루치오 갈로입니다.
실존인물 앙드레 셰니에르/안드레아 셰니에의 초상입니다.
그런데 오페라 내에서 안드레아 셰니에의 기소장을 쓰는 장면을 보면, 무언가 이상합니다. 반역죄 등을 날조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출생지나 학교 등을 혐의로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아닌 외국에서 태어났으니 외국인이고, 사관학교를 나왔으니 나라의 적으로 취급해야 하며, 시인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증거라는 식입니다. 차라리 없는 반역죄를 날조해 뒤집어씌운다면 모르겠는데, 저런 게 사람을 처형시킬 근거로 삼은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앙드레 셰니에르가 처형당하던 시절에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말기, 공포정치 시대였으니까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는 사치를 일삼고 국민들을 착취하던 국왕 일가와 고위 귀족들을 내쫓았다는 식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는 경우가 은근히 많은데, 그 와중에 벌어진 일들은 무법천지의 혼란상 그 자체였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은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빈약한 혐의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지요. 1789년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http://blog.daum.net/ariesia/48 어느새 극도의 혼란만이 성행하는 사회를 만들어버렸습니다. 막연한 이상만 있고 구체적인 비전이나 실행력은 없이,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밀고 나간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윗사람 몇몇을 없애기만 한다고, 갑자기 살기 좋은 나라가 될리는 만무했던 겁니다. 오히려 극도의 흥분한 사람들이 혼란을 부추기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곳곳에서 다짜고짜 사람을 끌고가서 죽여버리는 식의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학살도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막시말리안 로베스피에르가 1793년경 이 상황을 타개시킬 방책을 추진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공포정치였습니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초상화입니다.
이 공포정치라는 정책의 내용인즉슨, 혐의가 포착되기만 해도 처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서, 혼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방지하겠다는 취지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구실로 기소된 사람이 많았습니다. 오페라 내에서 안드레아 셰니에가 유죄라는 증거로, 유럽도 아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다는 것, 귀족들이 다니던 사관학교에 다녔다는 것 등이 제시되는데, 실제 당시 역사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빈약한 증거로도 처형당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설사 프랑스 내에서 태어나 귀족 전용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해도 귀족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처형되었을 것이며, 설사 귀족 출신이 아니라 해도 귀족 사교계와 살롱에 드나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당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건, 공포정치 기간이 그 직전 몇 년간에 비하면 그나마 최소한의 사법적 기준은 유지하고 있다는 평이 많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공포정치 기간 동안에는 귀족이 아닌 사람이 어떤 귀족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처벌받을 일로 여겨졌다면, 공포정치 직전 기간에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기만 해도 당장 죽였던 수준이었던 겁니다. 공포정치의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잘 굴러가던 나라를 공포정치를 시행하서 요상하게 만든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까웠습니다. 오페라 내에서 제라르는 안드레아를 기소하기 위해, 억지 근거로 가득찼을지언정 일단 공소장을 쓰기는 했는데, 공포정치 이전이었다면 아마 안드레아가 반혁명 분자라는 식으로 증언만 했어도 충분히 안드레아를 처형대로 보낼 수 있었을 겁니다.
실존인물 앙드레 셰니에르는 이 공포정치가 끝나기 3일 전에 처형되었습니다. 앙드레 셰니에르가 처형된 지 3일이 지난 뒤,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 수많은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로베르피에르를 비롯한 공포정치의 중역들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프랑스의 지도자 자리에 오르면서, 프랑스 대혁명은 사실상 끝나지요. 그 와중에 앙드레 셰니에르처럼 수많은 귀족들이 별다른 혐의 없이 처형되었고, 학살이 벌어지는 혼란한 와중에 휘말려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끝난 직후 집권층들이 프랑스 대혁명을 무위로 돌리려고 한 것은, 비단 민중봉기를 탄압하려는 의도뿐만이 아니라, 이 혼란상에 질려버린 대중들이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당장 반대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신분을 이유로 착취당하는 제도를 민중들의 손으로 뒤엎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과 유럽 각국에 뚜렷하게 각인되었고, 이것은 훗날 여러 민중운동화 공화주의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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