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가 작곡한 음악 중 가장 유명한 음악은 아마 <로엔그린>의 결혼행진곡일 것입니다. <로엔그린>의 줄거리 자체는 전형적이고 간단해 보입니다.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절대 자신이 누군지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여주인공을 위해 결투하고, 결투에서 이겨 여주인공과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결혼식 날 남주인공에게 당신이 누구냐는 질문을 해버리고,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던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이 금기를 깨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체적인 내용은 이렇게 간단하지만, 디테일을 살펴보면 의아해 보이는 점이 많습니다. 남주인공 로엔그린이 여주인공 엘자를 위해 싸우게 된 계기부터가 좀 비논리적으로 보이지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여주인공을 위협하는 세력을 무력으로 격퇴한 것처럼만 보이는데, 정확히 말하면 조금 다릅니다. 브라반트 지역을 다스리던 브라반트 공작에게는 딸 엘자와 아들 고트프리트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사라지자 친척 프리드리히는 여주인공 엘자가 남동생을 죽였다고 고발합니다. 영주의 아들이 사라졌고, 아들이 없을 때 계승 1순위는 엘자이며, 엘자가 없다면 프리드리히가 다음 브라반트 공작이 됩니다.
이 재판을 위해 국왕이 행차합니다. 그리고 국왕의 판결은- 엘자가 유죄라고 주장하는 프리드리히와, 엘자의 무죄를 위해 싸우는 기사가 서로 결투했을 때, 이긴 쪽의 편을 들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엘자를 위해 싸우겠다는 기사가 없다면, 그 즉시 엘자는 유죄로 간주된다네요!
셰릴 스튜더가 '엘자의 꿈' 장면을 부릅니다. 1991년 바이로이트의 공연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위 장면의 독일어-한국어번역 대역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백조가 끄는 배를 타고 나타난 이름 모를 기사가 나타나, 엘자를 위해 싸워주겠다고 합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위에서 말한 대로입니다. 그리고 남주인공 로엔그린은 떠나가면서, 엘자의 여동생이자 원래 후계자인 고트프리트가 사라졌던 진짜 이유도 말해줍니다. 프리드리히가 고트프리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로엔그린은 자신의 신비한 힘으로 고트프리트를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와주고, 남매가 상봉하고 브라반트는 정당한 후계자를 환영하면서 오페라는 끝납니다.
전체적인 얼개는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 여주인공을 구하는 기사라는 구도가 도입된 단선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사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이상한 점이 좀 보이지요. 여주인공을 위해 남주인공이 싸운다는 게, 무슨 포로로 잡힌 여주인공을 구해내는 이야기도 아니고, 여주인공이 결백하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요? 결투하는 것과 재판하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재판관이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직접 재판까지 한다는 것부터가, 삼권분립에 익숙한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희한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황당한 건, 결투해서 이긴 쪽이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판결하겠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다른 기사가 대신 싸워주는 것도 가능하다네요. 이게 도대체 뭘까요?
<로엔그린>의 시대적 배경은 12세기 경 독일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유럽 지역에는 신명 재판, 일명 결투재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원칙은 로엔그린에서 묘사된 그대로입니다. 재판할 때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두 세력의 기사가 서로 싸워 이기는 쪽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지요. 신이 있다면, 진실을 말하는 쪽이 승리하게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이 신명재판에서는 다른 기사를 대신 고용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힘 있는 쪽, 내지는 강인한 전사를 고용할 수 있는 쪽이 재판에서 이기게 되는 제도였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저렇게 대신 싸워주는 대리 기사들은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기보다, 많은 돈을 받고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많은 중세 기사 서사시나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 등 중세 기사를 다룬 근대 소설에서는 고난에 처한 무구한 아가씨를 돕기 위해 정의로운 기사가 등장하는 플롯이 많습니다만, 현실은 그랬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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