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작품, 성범죄 피해 여성이 지탄받던 시대

아리에시아 2015. 1. 10. 11:56

경고> 이 글에서는 성범죄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오며, 피가 낭자한 장면을 그린 그림도 나옵니다. 이런 주제를 꺼리는 분이 있다면, 주의해주세요.

 

 

유럽에서 미술가가 자신의 이름을 작품에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르네상스 때부터입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서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수백여년 동안, 여성 미술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여성에게 사회활동이 허용되지 않던 시대였고, 미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즈음에는 여성에게 미술 교육을 시키는 것이 교양의 일환으로 널리 장려되기는 했지만, 소품이나 정물화, 풍경화만을 그리는 것이 여성스러운 것이라고 동시에 교육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거나 웅장한 주제를 다룬 그림만이 대작으로 인정받던 시대에, 이런 풍조는 여성 화가의 길을 제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이런 시절에도 그림으로 명성을 얻은 여성은 여럿 배출되었습니다. 이런 여성 화가 중 1호로 꼽히는 사람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입니다. 화가였던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아버지보다 훨씬 더 큰 족적을 남긴 화가가 되었지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는 '여류 화가 중에서는 잘 그렸다'가 아니라, '(유명한 남자 화가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손꼽히는 작품을 그린' 거의 최초의 여성 화가입니다. 그리고 17세기에 성범죄 피해자였던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떤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를,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 작가이기도 했지요.

 

 

아르테미시아가 19살 때의 일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아버지의 제자 중에 아우구스티노 타시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이 남자가 아르테미시아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다가 아르테미시아를 성폭행합니다. 아르테미시아와 아버지는 타시를 고소하지만, 당시의 법과 사회여론은 강간한 남자의 편을 들어주었고, 성폭행당한 여자를 오히려 지탄했습니다. 타시는 사실상 무죄방면되었고, 아르테미시아에게는 상처만이 남았지요.

 

아르테미시아는 이 경험을 자신의 그림에 녹여냅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유디트>입니다.

 

 

1614년-1620년 동안에 그린 그림입니다. 거의 같은 구도로 한 점 더 그리기도 했는데, 다른 버전에서는 유디트가 노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유디트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장부입니다. 홀로페르네스가 이끄는 군대가 자신의 고향을 유린하자,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는 척 침상에 들어갔다가, 침상에서 홀로페르네스를 죽이지요. 홀로페르네스의 군대는 당연히 패퇴하듯 퇴각했고, 유디트는 고향을 지켜냈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이 주제를 유난히 많이 그렸는데, 그때마다 유디트의 얼굴에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었고,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는 자신을 강간했던 타시의 얼굴을 그려넣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해 소개할 때마다, 타시의 이름은 언제까지나 기억되게 되었지요. 동시에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 남자가 아닌, 피해자 여성을 단죄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도요. 성범죄 피해 여성이 지탄받지 않는 시대가 된다고 해도, 이 그림이 명화로 남아있는 한, 성범죄 피해 여성이 지탄받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절대 잊히지 않겠지요.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여성들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주목할 점은, 현실 세계의 여성이 보일 법한 반응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주력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작품에서 성경이나 신화의 여성 이야기를, 아름다운 여성을 등장시킬 구실로만 삼고는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경의 다니엘서 외경에 나오는 수잔나 이야기입니다. 수잔나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성이었는데, 어느 날 목욕하고 있을 때 두 장로가 흑심을 품고 접근합니다. 수잔나의 몸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수잔나가 다른 남성과 간통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위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수잔나는 그 요구를 거절했고, 두 장로는 자신들이 협박했던 대로 위증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이 사건을 맡으면서, 두 장로가 거짓 진술을 하고 있으며, 수잔나가 결백하다는 것을 밝혀내지요.

 

이 이야기에서 주제가 되는 것은 수잔나의 정절과, 다니엘의 현명합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많은 작품에서는, 성경 이야기의 한 장면이라는 구실로 아름다운 여성이 목욕하는 장면을 그리는 데에 주력했습니다. 많은 화가들에게, 혹은 그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한 많은 감상자 및 소비자들에게, 수잔나 이야기는 성경 이야기라는 명목 하에 여성 누드를 그릴 수 있는 구실이었을 뿐, 사건의 본질은 오히려 뒷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잔나를 그린 많은 명화에서 수잔나는 그저 목욕하면서 옷을 안 입고 몸매를 드러낸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수잔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그렸습니다.

 

성범죄를 시도하려는 남자와, 그 남자의 먹잇감이 된 여성의 구도로 수잔나 이야기를 그렸지요. 보기만 해도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 작품을 두고서도, 장로를 타시에, 수잔나를 자신에 빗댔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하지만 설사 화가 자신이 그걸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그런 일을 당하고 처벌조차 하지 못했던 피해자로서, 성범죄 피해자의 심리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