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밖의 역사

슈트라우스의 <말 없는 여인>과 1935년의 괴벨스

아리에시아 2015. 5. 30. 11:33

오페라 작곡가와 대본가가 콤비를 이루어 같은 협력자끼리 여러 오페라를 완성한 사례는 많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오페라 대본이란 오랫동안 오페라에서 노래부르는 구실을 제공하는 장치 정도로만 여겨졌고, 대본 수준도 조야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부분의 감상자는 오페라 대본보다 음악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오페라계에서 회자되는 작곡가-대본가 콤비는 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차르트-다 폰테 콤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후고 폰 호프만슈탈 콤비지요.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시기,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오페라 대본을 주는 대로 받아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오페라의 극적 완성도를 중시했고, 대본을 보고는 줄거리를 보다 짜임새 있게 만들기 위해 세세한 수정을 요청하고는 했습니다. 덕분에 모차르트는 대본가에게 귀찮은 작곡가로 여겨지게 되었고, 20살 이후 작곡한 오페라의 대본가들은 하나같이 모차르트와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도망가거나, 우여곡절 끝에 다음 작품을 계약하면 도중에 파기하고는 했습니다. 모차르트가 20살 이후 협업한 대본가 중 모차르트와 2작품 이상을 완성한 대본가는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로렌초 다 폰테,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의 대본가입니다. 이 작품들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리고 모차르트-다 폰테 콤비에 버금가는 오페라 콤비로 꼽히는 두 명이 있으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후고 폰 호프만슈탈입니다.

 

왼쪽 사진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른쪽 사진이 후고 폰 호프만슈탈입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20세기 독일 음악계의 별 같은 존재였습니다. 1905년의 <살로메>, 1909년의 <엘렉트라>는 20세기 오페라의 지평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었고, 1912년의 <장미의 기사>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 뒤로도 꾸준히 작곡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당대의 문학가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이 대본가로서 함께했지요. 하지만 이 두 명의 콤비는 1929년 <아라벨라>의 대본을 완성한 직후에 끝나고 맙니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장남이 자살했고, 호프만슈탈은 아들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쓰러져 그대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호프만슈탈이 죽은 뒤에 슈트라우스가 새롭게 선택한 대본가는 슈테판 츠바이크였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사진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작가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오늘날에는 메리 스튜어트 http://blog.daum.net/ariesia/8 평전과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 http://blog.daum.net/ariesia/40 으로 유명합니다.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경솔하지만 상냥하고 악의는 없었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바로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에서 악녀로 통용되던 인물을 동정적으로 서술하되, 무조건 미화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농장 아가씨처럼 소박하게 노는 것을 좋아했지 사치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농장 아가씨처럼 노느라 왕비로서의 공적인 의무를 소홀히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메리 스튜어트 평전에서는, 메리를 경솔하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합니다. 호화로운 궁정의 왕비로서는 어울릴지 몰라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군주로서는 낙제였다는 것을 통렬히 지적하고 있지요.

 

 

슈트라우스는 츠바이크의 대본으로 <말 없는 여인  Die schweigsame Frau>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말 없는 여인>의 원작은 17세기의 희곡으로, 도니제티의 <돈 파스콸레> 등 많은 작품에서 쓰였던 모티브를 다루고 있습니다. 돈 많고 아이 없는 노인이 상속자인 조카와 사이가 틀어지고 결혼하려고 하는데, 조카는 오히려 꾀를 써서 자기네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한 뒤, 한바탕 골탕을 먹인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이야기에서는 대개 노인 삼촌을 골탕먹이는 장면을 코미디 소재로 삼는데, <말 없는 여인>은 오히려 노인 삼촌 쪽을 우호적으로 묘사한다는 특징이 있지요. <말 없는 여인>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 가장 연주하기 까다로운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말 없는 여인>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모로서스 경은 사고로 청력이 좋지 않아, 가정부의 말소리조차 참지 못할 지경입니다. 어느 날 모로서스 경은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서 죽은 줄 알았던 조카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조카를 환영합니다. 하지만 조카가 오페라단에 들어갔고, 오페라단 동료와 함께 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내지요. 오페라라니, 귀족이 오페라단에 들어가는 것은 체통 없는 행동으로 여겨지던 건 둘째치고, 청력이 좋지 않은 모로서스 경에게는 고문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헨리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며,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이고, 신붓감으로는 말수 없는 여인을 원한다고 선포합니다.

 

이에 헨리는 오페라단 동료이자 연인인 아민타를 삼촌에게 신붓감으로 소개한 뒤, 아민타와 한바탕 난리를 피운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주인공 일행의 친척 어른 골탕먹이기 작전은 성공합니다. 결혼 전에만 해도 아민타는 숫기 없고 말 없는 아가씨 행세를 했지만, 결혼을 하자마자 다시없는 수다쟁이가 되었고, 모로서스 경은 이혼하자는 말을 꺼냅니다. 그리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헨리 일행은 모로서스 경에게 모든 것을 알리며, 헨리는 모로서스 경의 축복과 함께 아민타와 맺어지게 되지요. 모로서스 경이 "얼마나 아름다운 음악인가 Wie schon ist doch die Musik"를 부르면서 오페라의 막이 내립니다.

 

<원래 올렸던 오페라 동영상이 삭제되어서, 다른 영상으로 대체합니다. 쿠르트 몰과 레리 그래스트가 출현한 19712년 뮌헨 공연으로, 영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모로서스 경에 베이스 쿠르트 몰, 아민타 역에 소프라노 레리 그래스트입니다.>

 

 

 

 

 

<말 없는 여인>은 1935년에 초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초연을 전후해 석연찮은 운명을 맞습니다. 초연에는 대본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불참했으며, 당시 독일 문화부 장관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장관도 돌연 불참했고, 단 한 번의 초연 후 10년 동안 이 작품은 독일에서 다시는 연주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독일 문화정책의 수장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사진입니다.

 

1935년, 독일은 나치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정교한 선동정책으로 후대에 악명을 남긴 괴벨스가 문화부 장관으로서 선전 및 문화정책을 총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유대인 대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슬슬 교묘하게 유대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정책을 시행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말 없는 여인>이 초연되기 1년 전, 츠바이크는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이미 외국으로 망명한 상태였으며,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못합니다. 괴벨스는 <말 없는 여인>의 대본가인 츠바이크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트집잡았고, 공연에서 대본가의 이름을 삭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슈트라우스는 그 요구를 거부했고, 현존 독일 음악가 중 최고 명망가인 슈트라우스의 입장은 관철되어 츠바이크의 이름과 함께 초연되었지만, 이후 이 작품은 1945년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 다시는 독일 땅에서 공연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 대본가의 이름을 초연 포스터에 기재했다는 이유로 현존 독일 최고 작곡가가 불이익을 받은 것은, 이후 벌어질 일에 비하면 예고편도 못 될 정도로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194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유대인 탄압과 대학살이 시작되었으니까요. 슈트라우스의 둘째 아들은 유대인 여성과 결혼했는데, 나치는 슈트라우스가 자신들에게 협조한다면 둘째 며느리와 그 손주들은 유대인 차별정책에서 제외시킨다고 제의했습니다. 슈트라우스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고, 나치 정권은 나치 행사에서 음악 지휘를 맡기는 등 슈트라우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세계적인 예술가가 정권을 위해 활동한다는 대외적 구도를 만들어서 나치 정당화에 써먹었습니다. 슈트라우스가 나치 음악 행사에 얼마나 활발히 참여했는지, 전후 나치 부역 재판이 벌어졌을 때 슈트라우스가 나치 가담 혐의를 받았을 정도지요.

 

그토록 살뜰히 동원되는 것마저 감수했는데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에게 허용된 것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나치 정권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예술가들이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유대인 몇몇을 구하는 것 정도는 간혹 허락해 주었지만, <말 없는 여인> 초연 때를 비롯해 나치에 반항적이라고 판단된 슈트라우스는 해당사항이 없었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유대인 친구들을 구할 수도 없었고, 둘째 며느리와 아이들이 거리와 학교에서 모욕당하는 것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만 했으며, 둘째 며느리의 친정 부모조차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 둘째 며느리의 부모가 수용소에 끌려갔을 때, 슈트라우스는 수용소까지 찾아갔지만, 결국 문앞에서 돌아와야만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