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티토 황제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는 1791년 초연된 작품입니다. <마술 피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고, 모차르트의 사실상 마지막 오페라 작품으로 남았지요. 제목을 번역하기가 애매해서, 티토의 자비, 티투스 황제의 자비, 티토 왕의 자비 등 수많은 번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라 클레멘차 디 티토라는 원제가 은근히 길어서, 원제를 음차해 제목으로 쓰기에도 애매해서 더욱 그렇고요.
<티토 황제의 자비>는 이른바 '모차르트 7대 걸작' 중 가장 인기도가 낮은 작품입니다. 모차르트 7대 걸작은 작곡 순서대로 <이도메네오>, <후궁 탈출>,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마술피리>, <티토 황제의 자비>인데, <티토 황제의 자비>는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지요. 어린이용 위인전 등에서 소개되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작곡가 모차르트의 이름이 없었다면 작품 자체만으로는 오늘날까지 회자되기는 했을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티토 황제의 자비>는 7대 걸작 중 유일하게, 모차르트가 기존 대본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대본대로 작곡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대본에는 당시 유행하던 오페라의 특색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요. 모차르트의 대표작만큼의 대본 짜임새를 기대하고 이 작품을 봤다가는, 허술하고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줄거리와 얄팍한 캐릭터에 당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내용은 대사로 대충 전달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구절에 아리아를 집어넣지 않나, 캐릭터들은 신념이나 일관성은커녕 줏대도 없어 보이고, 얄팍하거나 이리저리 휘둘리고는 하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술한 계획이나 황당한 사건도 연달아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오페라는 거의 그랬습니다. 대본의 극적 짜임새에 천착했던 모차르트는 오히려 별종 취급을 받았고, 오페라 대본가들 사이에서 기피인물이 되었지요. 이른바 7대 걸작 중 두 작품 이상을 같이한 대본가는 로렌조 다 폰테 한 명밖에 없습니다.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의 대본가지요. 다른 오페라 대본가는 하나같이 모차르트가 대본에 툭하면 수정을 요구한다고 학을 뗐으며, 대본계약이 끝나자마자 모차르트와 상종도 안 하거나, 다음 작품을 어찌어찌 계약은 했는데 파토내고 도망치거나,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티토 황제의 자비>만큼은 대본을 수정할 시간이 없었고, 결국 이런 스토리가 나와버린 것입니다.
<티토 황제의 자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티토라는 이름의 황제가 있고, 티토 황제에게는 세스토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세스토는 티토 황제가 세스토의 여동생 세르빌리아에게 청혼할 정도의 신의와 인망을 얻고 있습니다. 티토 황제는 혼담 직후 세르빌리아가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진실한 고백에 감명받고 연인을 축복할 정도의 아량을 지닌 자비로운 군주고요.
하지만 이런 자비로운 티토 황제에게도 음모를 꾸미는 세력이 있었으니, 티토와 결혼해 황후가 되고자 하는 비텔리아라는 여인입니다. 비텔리아는 티토와 결혼할 수 없게 될 것 같자, 오히려 티토 황제를 암살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세스토는 이 비텔리아를 사랑하고 있었고, 비텔리아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티토를 암살해 달라고 세스토를 부추깁니다. 세스토는 결국 비텔리아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티토 황제 암살 계획을 실행합니다. 암살 계획은 실패했고, 세스토는 체포되었으며,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자백하며 비텔리아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습니다. 결국 세스토에게는 사형이 선고됩니다. 세스토는 감옥에 각혀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그 상황에서도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보다도, 황제이자 친구인 티토에게 더없는 배신감을 안겨주었다는 것에 더욱 괴로워하는 아리아를 부릅니다. 이 아리아가 '아, 이 순간만이라도 Deh, per questo istante solo' 입니다.
비텔리아는 세스토가 자신의 이름을 끝내 발설하지 않고 혼자 뒤집어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자백합니다. 티토 황제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합창단이 티토 황제의 자비로움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오페라의 막이 내립니다.
200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에서의 '아, 이 순간만이라도' 장면입니다. 메조소프라노 베셀리나 카사로바가 부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아, 이 순간만이라도' 아리아의 이탈리아어- 한국어 대역 번역본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이 오페라의 배경은 1세기경의 로마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 이름이 이탈리아식, 라틴식이 혼용되고 있지요. 고대 로마 인명으로, 티토 황제는 티투스, 세스토는 섹스투스가 됩니다. 그래서 이 오페라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티토와 세스토, 티투스와 섹스투스라는 표기가 혼용되고 있지요.
이 오페라의 티토 황제는 실존인물입니다. 고대 로마의 티투스 황제에서 따온 인물이지요. 티투스(30~81, 재위기간 79~81)는 자비롭고 관대하기로 이름높은 황제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폼페이 화산 폭발(79년) 등 로마 제국에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나는 바람에, 자연재해 수습만 하다가 과로로 죽었다는 이미지가 강한 것 외에는 남긴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위 2년여만에 죽었기에 별달리 역사적인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티투스 황제는 선량하고 자비롭기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고, 이런 성품 덕에 많은 미담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티투스 황제의 초상조각입니다.
18세기에 이 티투스 황제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오페라는 그야말로 수없이 나왔고, 작곡된 작품은 무려 천여 편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티투스 황제의 이야기가 대중적으로 인기있었던 것과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대중극장에서 공연되는 작품보다, 군주의 대관식 등을 축하하며 작곡된 행사용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았거든요. 군주의 행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관대한 황제가 등장하는 티투스 이야기는 더없이 적절한 소재로 여겨졌고, 대중극장에서는 거의 공연된 적 없는 것과 대조적으로 군주의 행사축하장에서는 수없이 많이 공연되었습니다.
모차르트의 <티토 황제의 자비>는 1891년 신성로마제국의 새 황제가 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위촉된 작품입니다. 전 황제가 죽은 직후에 계획된 작품인데다 새 황제의 대관식 날짜를 맞춰야 했기에 작곡일정이 급박했습니다. 모차르트는 대본을 짜임새있게 수정하기는커녕 작곡할 기간조차 촉박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내는 훗날 이 작품을 불과 20여일 동안 작곡했다는 말을 남긴 바 있고, 후대의 연구에서도 이 작품을 작곡하는 데 들인 기간은 길어야 6주 남짓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오페라를 기일 내에 작곡하는 데에 완성했고,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수많은 오페라 중 오늘날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대관식에서 새 황제가 된 레오폴트 2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마리아 테레지아의 둘째 아들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째 아들이자 레오폴트 2세의 형은 '국민 극장 정책'을 추진했던 요제프 2세였습니다. http://blog.daum.net/ariesia/39 요제프 2세는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은 뒤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렸지만, 즉위 10년만에 아들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요제프 2세의 첫째동생인 레오폴트 2세가 그 뒤를 이어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1765년 레오폴트 2세와 요제프 2세를 같이 그린 초상화입니다. 왼쪽의 하얀 옷이 레오폴트 2세, 오른쪽의 검은 옷이 요제프 2세입니다.
요제프 2세의 죽음과 레오폴트 2세의 즉위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요제프 2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를 지향하며 이상주의에 입각한 많은 개혁정책을 펼쳤는데, 이 정책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나머지 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 많았고, 문제 개선은커녕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키는 사태도 종종 일어났습니다. 국민극장 정책은 기껏해야 별 성과를 내지 못한 국책프로젝트 정도로 끝났지만, 토지개혁 등에서는 반발이 심해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지경이었고, 대외정책도 실패를 거듭했지요. 현실을 파악하지도, 현실을 구체적으로 개선할 방안도 세우지 않고, 그저 이념만을 최우선하며 나라일에서 밀어붙이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례처럼요.
요제프 2세의 개혁정책은 개혁의 대상인 지배층은 말할 것도 없고, 피지배층도 너무나 뜬금없는 정책에 오히려 반감을 가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레오폴트 2세는 즉위하자마자 요제프 2세의 모든 정책을 되돌려버립니다. 이것은 요제프 2세의 실책을 되돌리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개혁정책이라는 기치자체를 묻어버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레오폴트 2세는 자신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오페라인 <티토 황제의 자비>가 초연된 다음해에 죽었지만, 레오폴트 2세의 정책 기조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란츠 2세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그 뒤로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은 과거의 것을 답습하는 정책만을 실시했고, 20여년 후 나폴레옹에게 속절없이 무력하게 밀리는 신세가 되지요.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인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고, 나폴레옹에게 밀린 이후 신성로마제국이 사실상 궤멸하자,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직함을 새로 만들어 1대 오스트리아 황제로 스스로 즉위합니다. 새 황제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티토 황제의 자비>가 공연되던 시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역사의 갈림길에서 역사적인 선택을 내리는 시점에 있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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