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중에는 아이들을 위해 작곡된 작품도 드물게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입니다. 이 작품은 원래 연극 배경음악을 작곡하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훔퍼딩크는 어느 날 아이들이 연극하는 데 실감나도록 주요 장면의 배경음악을 작곡해 달라는 의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배경음악을 작곡하다가, 예술적 영감이 불붙은 훔퍼딩크는 아예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오페라를 한 편 작곡하지요.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은 유명한 그림 동화의 원전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림 동화 원본에 비해 훨씬 순화되었습니다. 그림 동화에서 초기 판본에서는 친어머니, 훗날 개정된 판본에서는 새어머니는 식량이 부족하다면서 작정하고 헨젤과 그레텔 남매를 버리려 합니다. 하지만 오페라에서는, 어머니는 그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라도 좀 구해오라고 닦달했을 뿐이었고, 아이들이 멀리까지 가다가 길을 잃어버렸지요.
오페라 버전 <헨젤과 그레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은 장난꾸러기 남매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외출한 사이 어머니가 먹을 것이 없다면서 남매더러 놀지만 말고 먹을 것이라도 구해 오라고 닦달합니다. 남매는 그 말을 듣고 정말로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지만, 멀리 나가는 바람에 마녀가 있는 숲까지 갔다가 길을 잃고 맙니다. 아버지는 돌아오자마자 그 소식을 듣고, 놀라서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나가죠.
한편, 아이들은 숲에서 과자로 만든 집을 보고 넋을 잃습니다. 집 주변에 과자로 된 인형이 잔뜩 서 있었고, 집은 온갖 맛있는 과자로 만들어져있었던 것이지요.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과자집의 과자를 먹어치우고, 다음 순간 나타난 집 주인은 오히려 아이들을 집으로 들여보내주죠.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집 주인은 마녀였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은 위험에 빠지지만, 그레텔이 기지를 발휘합니다. 마녀가 그레텔에게 화덕을 보라고 시키자, 그레텔은 화덕을 보는 방법을 모르겠으니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마녀가 시범을 보인답시고 화덕가에 있는 사이, 그레텔은 마녀를 화덕에 빠뜨리고 물리치지요. 마녀가 사라진 순간, 과자 집 주변의 과자 인형들이 모두 아이들로 변합니다. 그 과자 인형들은 마녀가 과자로 변하게 한 아이들이었던 것이지요. 그 순간 헨젤과 그레텔 남매를 찾으러 온 부모가 그곳에 도착하고,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도 구하고 부모도 만나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2013년 매직칸타빌레 오페라단에서 공연한 <헨델과 그레텔>입니다. 노래 가사를 모두 한국어로 번안한 공연입니다. 헨젤 역에 손지영, 그레텔 역에 임금희가 출연한 공연입니다.
<헨젤과 그레텔>은 아이들에게 보여 주기 좋은 오페라로 첫손 꼽히는 작품이지만, 세계 2차 대전 직후에 공연이 금지된 적이 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마녀가 화덕에서 최후를 맞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유대인 대학살의 가스실을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많았던 것이지요. 얼마 후 <헨젤과 그레텔>은 다시 무대 위에 올려지게 되었지만, 저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헨젤과 그레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주 언급되게 됩니다.
세계 2차 대전 시기,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는 전례 없는 인종차별과 인종학살을 저지릅니다. 열악한 시설의 수용소에 수감해 서서히 죽어가게 만들거나, 작정하고 학살했지요. 5년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600만명의 사람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유대인이 520만명 정도, 집시가 80만명 안팎, 그 외에도 동성애자, 장애인 등 나치가 탄압하던 사람들이 수없이 살해되었지요. 나치는 이 때 단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는데, 1차 대전 때 무기로 발명된 독가스로 대량 학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시체도 가스실에서 불태워 대충 처리해버렸지요. 이 일들을 '홀로코스트'라고 하는데,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대량학살과 전쟁범죄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입니다.
동화에서 악역이 최후를 맞는 장면에서 전쟁범죄를 떠올리다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옛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일입니다. 과민반응이었던 걸까요,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을 배려한 타당한 예방조치였던 걸까요? 글쎄요. 확실한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 사건을 연상한 관객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시기에는 공연 도중에 공연을 계속하기 힘들 정도로 항의가 빗발친 적도 여러 번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이런 일은 비단 <헨젤과 그레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좀비가 등장해 사람을 잡아먹는 영화를 개봉하지 못하게 했는데, 1930년 전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연상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시기 우크라이나는 스탈린이 집권하던 소련 치하에 있었는데,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난데없이 자신이 지정한 방식대로만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명을 내립니다.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고요. 그리고 그 다음 몇 년 동안, 우크라이나에는 유례없는 대기근이 찾아옵니다. 그 와중에도 소련이 지정한 분량의 곡식은 꼬박꼬박 바쳐야만 했고요. 기근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시신의 고기마저도 먹기 시작했고, 자신의 아이와 옆집 아이를 서로 바꾸어 그 아이를 죽여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 시기 죽은 사람은 한때 1000만명이 넘는다고 알려졌을 만큼, 극심한 대기근이었습니다. 현재는 1000만명은 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형상을 한 좀비가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을 내보낼 수 없다고, 나라에서 결정을 내려 금지시킨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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