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밖의 역사

드보르자크의 <루살카>와 체코 민족주의

아리에시아 2015. 12. 5. 11:58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루살카>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흔히 동유럽판 인어공주라는 별칭이 따라붙고는 합니다. 널리 알려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이야기와 전체적인 줄거리와 모티브가 비슷하거든요. 물의 요정이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파멸하게 된다는 대가로 인간이 되는 계약을 맺었고, 그 인간이 결국 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리는 바람에 소멸하게 된다는 이야기니까요. 특히 마녀에게 인간이 되는 조건으로 목소리를 내주는 계약을 맺었다는 대목과, 마녀를 다시 만났을 때 사랑에 빠진 남자를 죽이면 인간이 되는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루살카>와 인어공주 이야기를 겹쳐보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인어공주>와 달리 <루살카>에서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잘못을 뉘우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과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자청하고, 결국 운명을 함께하게 되지만요.

 

 

<루살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주인공 루살카는 물의 요정인데, 인간 세계의 왕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루살카>에서 가장 유명한 '달에게 보내는 노래' 혹은 '달에게 바치는 노래'가 바로 루살카가 인간 왕자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노래지요. 루살카의 아버지는 물의 요정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파멸을 자처하는 식이라는 논리로 루살카를 말리려 하지만, 루살카는 듣지 않습니다. 결국 루살카는 마녀 예지바바와 계약을 맺어서, 인간 남자가 루살카가 아닌 다른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면 루살카가 파멸하게 된다는 조건으로, 예지바바와 도움을 받아 인간이 되기로 합니다.

 

루살카는 자신이 사랑하게 된 왕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왕자는 홀연히 나타난 루살카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으로 데려옵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데다 태생이 물의 요정이라 체온이 싸늘한 루살카에게서, 왕자는 이내 마음이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외국 공주를 환영하는 무도회에 루살카를 데려와놓고는, 외국 공주가 왕자에게 살갑게 굴자 루살카를 내버려 두고 루살카 눈앞에서 외국 공주와 어울리기까지 합니다.

 

절망한 루살카는 마녀 예지바바와 다시 만납니다. 예지바바는 루살카에게, 루살카가 사랑에 빠진 남자를 죽이면 루살카는 다시 물의 요정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루살카는 그 제의를 거부하고, 스스로 파멸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 직후 왕자가 루살카 앞에 나타납니다. 자신이 루살카를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루살카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루살카를 찾아다닌 것이지요. 그리고 왕자는 루살카에게 키스해 달라고 하고, 루살카는 지금 자신이 키스하면 자신과 죽음을 함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왕자는 그 말을 듣고도, 어쩌면 들었기 때문에 루살카에게 더욱 간절하게 키스해달라고 애원하다시피 간청하며, 루살카는 왕자에게 키스합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죽음을 맞게 되지요.

 

 

소프라노 신지화가 "달에게 보내는 노래"를 부릅니다.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루살카>는 체코어로 작곡된 작품입니다. 체코어는 유럽 지역의 언어 중에서도 배우기 힘든 언어로 손꼽힐 정도로 어려운 언어이며, 외국인이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작곡되었다는 것은 체코어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데 핸디캡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수들이 가사를 외워야만 공연할 수 있는 오페라에서는 더했지요. 하지만 체코어라는 핸디캡에도 물구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체코어 오페라가 몇몇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루살카>입니다. 음악이 너무나도 아름답거든요. 체코어가 워낙 난해해서, 사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어로 번역된 버전으로 주로 공연되었지만, 요즘에는 체코어 원어로 공연될 때가 많습니다.

 

 

<루살카>가 체코어로 작곡된 것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게 비칩니다. 체코 지역에 태어나 체코 지역에서 활동한 작곡가가 체코어로 작품을 만든 것이니까요. 하지만 <루살카>가 1901년에 발표되었다는 것과, 체코라는 나라의 역사를 나란히 놓았을 때, 상황은 복잡해집니다. 근대 이래 유럽 역사에서, 체코어를 모국어로 채용한 최초의 국가가 나타난 것은 1918년이니까요. 바로 1918년 새로 건국된 나라 중의 하나였던 체코슬로바키아입니다.

 

이것은 <루살카>가 하필이면 독일어로 번역된 버전으로 세계 무대에서 유명해졌다는 것과도 맞물립니다. 오페라계에서 유명한 유럽 언어는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이 있습니다. 군소 언어로 작곡된 작품이 이른바 메이저 언어로 번역되어 공연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하필이면 독일어로 번역된 버전만이 유명해진 겁니다. 체코어와 독일어가 그리 비슷한 언어인 것도 아닙니다. 비슷한 것으로 따지자면, 차라리 체코어와 러시아어가 더 비슷하지요.

 

 

현재의 체코는 1918년 이전에는, 수백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에는 체코라는 이름 대신, 보헤미아라는 이름으로 불렸지요. 합스부르크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으로서 체코-보헤미아의 입장은 애매했는데,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일종의 속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사람이라는 이유로 법적, 제도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이 지역 출신이 합스부르크 본국의 정책을 따르면 이런저런 우대를 받거나, 최소한 제국의 신민으로서 합스부르크 본국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는 있는 환경을 만들었지요. 이러다 보니 체코-보헤미아 지역의 토속적인 지역색은 갈수록 희석되었고, 18세기 경에 이르면 합스부르크 본국에서 사용하는 독일어가 사실상 모국어처럼 통용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공식적인 업무에서는 어차피 독일어만이 사용되는 데다가, 독일어를 알면 출세와 학업 등에 절대적으로 유리하지만, 체코어는 딱히 필요할 일도 없고 굳이 배울 필요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지요. 

 

하지만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체코-보헤미아 지역의 분위기도 바뀌게 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본국인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다민족 국가의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오스트리아 제국 곳곳에서 여러 민족들이 자치권을 얻거나, 나아가 분리독립을 추구하자는 운동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민족 고유의 문화를 되살리고 지역색을 강조하는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그때까지는 오스트리아 본국의 독일어 및 합스부르크 문화가 세련되고 격조높은 것으로 여겨지고, 토속적인 문화는 어딘지 촌스럽거나 급이 낮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는데, 이제 후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리고 체코-보헤미아 지역에서도 독일어 대신 체코어로 작품을 쓰고, 그 지역의 전설 등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음악에서도 이런 민족주의 풍조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체코 민족주의 음악 사조라고 할 수 있는 국민악파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여럿 배출했습니다. <루살카>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교향시 <나의 조국>과 오페라 <팔려간 신부> 등으로 유명한 스메타나, 오페라 <예누파>, <마크로풀로스 사건> 등의 작품을 발표한 야나체크 등이 바로 국민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입니다. 이 작곡가들은 체코-보헤미아 지역의 설화를 작품의 소재로 삼거나, 작품에서 이 지역을 굳이 무대로 설정하거나, 민요의 선율 등을 작품에 차용했으며, 체코어로 노래하는 작품도 여럿 발표했습니다.

 

<루살카>는 바로 그런 경향의 정점에 선 작품입니다. 체코 지역의 물의 요정 설화를 소재로, 체코어로 작곡했으며, 유려한 음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이지요. 그리고 독일어 문화권 영역에서 체코어로 작곡된 작품이 오랫동안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모국어는 체코어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속국이었던 것과 맞물려, 독일어로 번역된 버전이 체코어 원어 버전보다 훨씬 더 널리 공연되었던 것이지요.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어 오페라를 독일어권에서 공연할 때에는 독일어로 번역해 부르고, 독일어 오페라를 이탈리아 지역에서 공연할 때에는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부르는 식의 상황이 일반적이었다는 것과, 체코어가 배우기 힘들기로 유명한 언어라는 것을 상기하면, 체코어 버전이 진작 보급되지 못한 것 자체는 그리 독특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페라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하필이면 독일어로 번역된 버전이 보급되었다는 것은, 이런 주변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지요. 1918년 체코어를 모국어로 삼은 나라가 비로소 출범한 뒤에, <루살카>가 이 나라 오페라단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는 것도, 그 주변상황과 궤를 같이하는 일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