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작곡가인 로시니는 자신이 작곡한 선율을 다른 작품에서 거의 그대로 써먹는 경우가 많기로도 유명합니다. 서곡 한 곡을 여러 편의 오페라에서 써먹기도 했고, 충분히 인기 있는 아리아를 다른 작품에서 써먹기도 했지요.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남주인공 테너에게 준 곡을 <라 체네렌톨라>의 메조소프라노 여주인공에게 다시 주는 등, 셀 수도 없습니다.
이전에 소개해드린 적 있는 <라 체네렌톨라>의 '슬픔과 눈물 속에서 태어나'입니다. 영상의 가수는 체칠리아 바르톨리이며, 자막은 없습니다.
'슬픔과 눈물 속에서 태어나'의 이탈리아어-한국어 번역 대본입니다. 번역 출처는 네이버캐스트입니다.
그런데 이 곡은 원래 다른 작품에서 테너를 위해 작곡한 멜로디를 거의 그대로 재활용한 것입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남주인공 알바미바 백작이 해피엔딩 결말 이후 부르는 노래였는데, 다른 작품에서 사용한 것이지요. 작품 자체는 인기가 없었지만 좋은 음악만을 선별한 것도 아니고, 가장 인기있던 작품의 노래를 다른 작품에서 태연히 재활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시니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작곡가들은 거의 다 그랬어요. 로시니 시대에는 그나마 좀 덜해진 것이고, 한 세기 전의 헨델 오페라 중에서는 헨델이 작곡한 선율만을 엮어내 버무린 오페라가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에는 자기복제 내지는 자기표절이라고 불릴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작곡한 선율을 재활용하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멋진 음악을 역사의 흐름 속에 사장시키는 것이라는 식으로 평한 당대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자기복제가 만연하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일까요? 하지만 당시 상황을 조금만 살펴 보면, 곧바로 납득이 됩니다. 베르디 이전의 오페라 작곡가에게, 저작권이란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르디 이전, 그러니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오페라 작곡가에게 저작권이란 없었습니다. 처음 공연할 때 극장측에게서 받는 계약금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오페라가 엄청난 인기를 끌어, 극장이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면? 다음 작품은 훨씬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극장 측에서 작곡가에게 이런저런 혜택을 얹어 주기를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안 줘도 그만입니다. 일종의 매절 계약이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한 번이라도 공연된 작품은 작가 손을 완전히 떠난 것으로 간주되어서, 작가의 의도와 완전히 다르게 편곡해 공연해도 항의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완성도 높은 작품보다 새로운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서, 새로운 작품이 끊임없이 나왔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표현처럼, 적당적당한 작품을 많이 만드는 것이 잘 만든 작품을 과작하는 것보다 더 유리해지면, 적당적당한 작품이 다수 쏟아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페라 작곡가는 공연업계의 요구에 맞추려면 다작을 해야 했고, 자신이 작곡했던 선율을 재활용하는 사례가 많아집니다.
18세기에는 이런 자기복제가 거의 관행으로 자리잡았는데, 급기야는 '파스타치오 오페라'라는 것까지 생겨납니다. 파스티치오 오페라란 여러 작품에서 좋은 선율만을 가져와 엮었다는 것을 대놓고 세일즈 포인트로 내세운 오페라입니다. 오페라 작곡가에게 저작권이 없고 지나간 작품이 재공연되는 일은 거의 없는 이 시대에, 자기복제는 자기표절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고, 선호하는 것이기까지 했습니다.
오페라 작곡가에게 저작권이 생긴 것은 베르디 이후입니다. 베르디가 최고 인기 작곡가가 된 후에,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인 것이지요. 작곡가에게 일시불 계약금만 지불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 공연 업계에서는,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르디에게 돈독 올랐다는 내용의 비난을 많이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고 인기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결국 베르디의 입장이 관철되어 오페라 작곡가도 저작권을 인정받게 되지요. 문화 부문에서는 상위 1%의 투쟁이 나머지 99%가 투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종종 있는데, 오페라 저작권이 인정된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작권이 인정되고 좋은 작품을 만든 만큼 창작자의 수익이 늘어나는 구조가 정착되면, 하나하나 정성들여 창작하는 문화가 정착할 수 있다는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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