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변형한 예술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의 만남

아리에시아 2013. 12. 14. 11:51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5촌 조카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된 제임스 1세의 어머니입니다.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극적인 삶을 살았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라이벌로도 유명하지요.

 

메리 스튜어트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작품으로 각색되었는데,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가 대면해 서로 불꽃을 튀기는 장면이 나오는 작품이 많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결혼을 한데다가 처형되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를 정식 공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서자도 반쪽이나마 핏줄 취급은 해 주었던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정식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는 법적으로 완전히 남남이며, 상속권을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후계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재산을 전혀 물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정당한 왕비를 쫓아내고 국왕의 독단으로 왕과 결혼했지만 얼마 후 처형당한 여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과연 왕좌에 앉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의 딸이지만 정식으로 공주가 될 자격이 있는지가 애매했고, 자연히 왕위계승권도 애매해지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평판도 좋고,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의 왕족에게 왕위가 넘어갈 판이라 엘리자베스 1세를 여왕으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계승권이 불확실하다는 것이 변하지는 않았지요. 잉글랜드를 뒤흔들고 싶은 세력에게, 이 문제는 너무나도 유용한 구실이 되어주었습니다. 잉글랜드 밖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여왕에 즉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메리 스튜어트가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메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 왕위에 딱히 욕심내지는 않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를 반대하는 세력이 메리 스튜어트야말로 진정한 잉글랜드 군주라고 말하는 것을 딱히 제지하지도 않았고, 때로는 은근히 편드는 언행도 보였습니다.

 

메리 스튜어트를 다룬 많은 예술작품에서는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가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장면에서는 메리 스튜어트가 자신이 정당한 잉글랜드 여왕이며 엘리자베스 1세는 찬탈자라는 식으로 주장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에 분노하는 장면이 어김없이 나옵니다. 극적인 대비와 불꽃튀는 라이벌 대결이 두드러지는 장면이지요. 이 이야기를 다룬 도니제티의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처음 공연했을 때는, 두 여왕 역을 맡은 가수가 얼마나 팽팽하게 긴장하고 치열하게 대립했던지, 가수가 공연하다가 혼절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는 장면을 그린 1894년의 삽화입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위협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쪽이 메리 스튜어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쪽이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예술작품에서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의 만남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역사상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는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외국 군주끼리 만난 적 없다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메리 스튜어트의 상황은 좀 더 복잡했습니다. 메리 스튜어트는 죽기 전 19년 동안은 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리던 잉글랜드에 있었고, 엘리자베스 1세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번 표현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끝내 메리 스튜어트를 만나지 않았거든요.

 

 

메리 스튜어트의 행적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태어난 지 1주일도 안 되어 아버지가 죽자, 메리 스튜어트는 갓난아기의 몸으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고, 메리를 프랑스 궁정에 보내고 자신의 섭정의 자격으로 스코틀랜드를 다스립니다.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다가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하고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왕비가 된 지 2년만에 국왕인 프랑수아 2세가 죽었고, 비슷한 시기에 섭정으로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어머니도 죽자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는 여왕으로서 스코틀랜드에 들어온 직후에 귀족 단리 경과 재혼해, 외아들을 낳습니다. 하지만 그 즈음 단리 경이 살해당합니다. 정황상 보스웰 경이 범인인 것이 거의 유력했지요. 그리고 보스웰 경이 메리 스튜어트를 납치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스코틀랜드 신하들은 메리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규합해 보스웰 경의 성으로 돌진합니다.

 

그런데.....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이 앞장서서 신하들에게 물러가라고 명하고는, 얼마 후 보스웰 경과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보스웰 경이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애인이며, 메리 스튜어트가 애인에게 사이가 좋지 않던 둘째 남편 단리 경을 죽이도록 사주하고, 그 뒤에 애인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지요. 스코틀랜드에서 봉기가 일어나 메리 스튜어트를 폐위합니다. 메리 스튜어트는 간신히 도망쳤고, 잉글랜드로 가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의탁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를 망명자로서 받아주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메리 스튜어트를 위해 잉글랜드의 군대를 스코틀랜드에 보내지는 않았고, 스코틀랜드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메리 스튜어트가 쫓겨난 뒤 외아들 제임스가 새로운 왕으로 옹립되었을 떄에도, 확고부동한 스코틀랜드의 군주로 인정해주었고요. 엘리자베스 1세를 사생아 출신 찬탈자로 매도하던 세력이 메리 스튜어트를 지지했고, 메리 스튜어트 자신도 그런 움직에 반대한 적은 없었으니,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를 환영할 리는 만무했지만요.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를 위해 스코틀랜드의 봉기군을 진압해주고 메리 스튜어트를 복위시켜 줄 것이라고 진심으로 기대했다면, 메리 스튜어트는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인물이 될 겁니다.

 

 

도대체 메리 스튜어트가 왜 저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오죽하면 저 소문대로의 이야기가 한동안 정설이 되었겠어요. 그 소문대로라면 한 나라의 군주로서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 행동이지만, 적어도 앞뒤는 들어맞고 인과관계 설명은 되거든요. 이에 대해 메리 스튜어트에게 그나마 가장 우호적인 견해는 대강 이렇습니다. 보스웰 경이 단리 경을 살해하고 메리 스튜어트를 납치한 후 강간해서 임신하게 되자,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강간당해 임신한 여자는 강간범과 결혼해야 한다는 법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여왕이 평판 나쁜 남편을 얻는 것이, 여왕이 사생아를 낳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길이었을 거라고 판단했을 거라는 견해도 있고요. 설사 이게 진실이라 해도, 메리 스튜어트는 여왕의 남편을 죽이고 여왕을 강간한 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여왕의 새 남편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되어버리지만요.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망명하는 길을 택한 것도, 당시 해류로는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가는 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설사 그랬다 해도, 이왕 잉글랜드에 도착했으면 숨어서 프랑스로 가는 배가 출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엘리자베스 1세에게 가는 것보다는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엘리자베스 1세를 적대하는 입장에서라면, 메리 스튜어트는 외교적으로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는 장소보다는, 자신의 존재가 유용한 협상 카드로 쓰일 수 있는 장소가 아무래도 낫지 않겠습니까?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를 망명객으로서 받아주었고, 메리 스튜어트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하지 않습니다. 지정된 지역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지만, 물질적으로는 여왕의 지위에 걸맞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잉글랜드 국고에서 큰 비용을 기꺼이 부담하게 합니다. 메리 스튜어트는 은식기를 사용하고 귀한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지냈으며, 산책이나 사냥도 할 수 있었습니다. 메리 스튜어트 본인도 일단은 얌전히 지냈지요.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정당한 여왕이며, 엘리자베스 1세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도 자녀 없는 엘리자베스 1세가 죽으면 계승 1순위의 인물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는 정치적으로 위험천만한 존재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키고 메리 스튜어트를 옹립하려는 반란 시도가 여러 번 있었고, 망명 19년째 일어난 배빙턴 사건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그러한 반란군과 접촉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 여왕을 해치려 한 죄목으로 잉글랜드에서 사형당하지요.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가 만나는 장면을 그린 예술작품의 대부분은 바로 이 시기를 무대로 합니다. 이런 작품에서 묘사되는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를 만났을 때에는 자비를 탄원합니다. 자애로운 여왕으로서 자신을 받아들여달라고요. 하지만 승자의 입장인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를 무시합니다. 확고부동한 여왕의 혈통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수시로 겪고 살아남은 후에도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던 입장으로서 느낀 질투심, 열등감, 그리고 그런 존재를 굴복시켰다는 우월감을 드러낸다고 묘사하는 작품도 많고요.

 

이런 작품에서 갈 곳 없는 망명자의 입장으로서 굴욕을 감수하려던 메리 스튜어트는, 거듭된 모욕에 결국 폭발하여 엘리자베스 1세에게 쏟아내듯이 말을 퍼붓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여왕의 자격이 없으며, 진정한 여왕은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고요. 세상이 순리대로 돌아갔으면 자신의 발 밑에 엘리자베스 1세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 반대가 된 것은 세상이 불의하기 때문인 것이라고요.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하고 자신을 즉위시키려는 계획이 진행되던 것은, 음모가 아니라 찬탈자가 차지한 왕위를 정당한 계승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분노하여 메리 스튜어트의 사형집행서에 최종 서명하지만, 메리 스튜어트는 '부당하게 탄압받던 정당한 여왕이 정정당당하게 행동한 것'에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당당하고 의연하게 최후를 맞이하지요.

 

 

실제 역사의 메리 스튜어트도 형리의 도끼에 삶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마지막을 숭고하고 장엄하게 연출하는 데 마지막 노력을 쏟았습니다. 이를 두고 메리 스튜어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제대로 몰랐지만, 어떻게 죽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는 평을 듣게 되지요. 메리 스튜어트가 장엄하고 위엄있는 의상을 차려입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마치 옛 성담에 나오는 성녀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의 마지막이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메리 스튜어트를 다룬 작품이 많은 것도, 메리 스튜어트가 엘리자베스 1세와 만나 당당하게 일갈하는 작품이 많은 것도, 그런 작품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살아남은 것도, 메리 스튜어트가 팽팽한 대결구도와 낭만적이고 극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덕분이겠지요.

 

 

메리 스튜어트는 통치자로서는 낙제점이었습니다.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으며, 정치적 안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 시대 로망의 여주인공으로 많은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리고 내내 핍박당하다가 장엄한 최후를 맞았다는 이미지를 구축한 덕에,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라이벌이라는 위치로까지 승격되어 드라마틱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실러의 희곡 <마리아 슈튜아르트>, 도니제티의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 그 외에도 메리 스튜어트를 장엄하고 멋있게 묘사한 작품이 많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장면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주 등장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사실무근이라지만, 극적으로는 너무나 흥미롭고 드라마틱한 소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