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과연 역사의 범주에 넣어야하는지는 좀 애매합니다만, 개인창작물이 아니고 옛부터 전해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유산인 것은 맞고, 넓은 의미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옛 역사"가 될 수 있으므로, 일단 역사 카테고리에 넣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아마조네스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아마존, 혹은 아마조네스는 용맹한 여전사의 대명사로 쓰이지요. 그리고 북유럽 신화에도 비슷한 존재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발키리'지요. 용맹한 여전사 캐릭터에 발키리라는 호칭을 붙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그걸 통해서 발키리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 경우도 많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발키리'의 이미지를 잘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존 찰스 돌먼의 1909년 작품입니다.
하지만, 막상 북유럽 신화 원전의 발키리는 여전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북유럽 신화의 발키리는 그냥 시녀입니다. 오딘 등 주요한 신의 시중을 들고, 심부름을 하는 역할입니다. 북유럽 신화가 거칠고 팍팍한 환경을 용맹함으로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많다 보니, 시녀인 발키리도 연약하고 청초한 아가씨라기보다는 강건한 여인에 가깝게 묘사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전사'는 아닙니다. 유명한 전사를 돕는 발키리의 이야기는 있어도, 스스로 용맹하게 싸우는 발키리 이야기는 전무합니다.
북유럽 신화의 여전사 캐릭터는 발키리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종족에서 나옵니다. 북유럽 신화의 신들은 거인족과 대립하는 관계인데, 거인족에서는 용맹한 여전사 캐릭터가 여럿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는 '스카디'의 이야기가 유명하지요. 스카디는 자신의 아버지가 북유럽 신화 신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싸움이 붙어 죽어버리자, 신들에게 복수하러 갑니다. 신들이 화평을 제의하고, 빛의 신인 발두르에게 첫눈에 반한 스카디는 자신에게 남편감을 준다면 그 화평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지요. 그러자 신들은 발만 보고 남편감을 고르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발두르가 제일 잘 생겼기 때문에 스카디는 가장 잘 생긴 발을 고릅니다. 하지만 스카디가 선택한 발의 주인은 바다의 신 뇨르드였지요. 눈이 쌓인 곳에 살던 스카디와 바닷가에 살던 뇨르드는 서로에게 적응을 못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일단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라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기는 하지만요.
그렇다면, 시녀였던 발키리가 왜 용맹한 여전사의 대명사가 되었을까요? 그 시작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였습니다.
<발퀴레>는 4부작 오페라인 <니벨룽의 반지>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바그너의 음악 중에서 아마 두 번째로 유명할 '발퀴리의 기행'이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첫 번쨰로 유명한 음악은 무엇이냐고요? <로엔그린>의 '결혼 행진곡'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 연주되는 그 음악이요.
<발퀴레> 3막의 첫 장면, '발퀴리의 기행'입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여 훨씬 더 유명해진 음악이기도 합니다. 용맹한 여전사인 아홉 발퀴리가 첫등장하여 강건한 기풍을 어필하는 장면입니다. 영상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1989년 공연, 지휘자는 레바인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발퀴리의 기행> 독일어-한글 대역 가사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번역본 출처는 <니벨룽의 반지> 첫번째 정식발매 dvd에 수록된 대본집입니다.
바그너는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했지만, <니벨룽의 반지>는 원전인 북유럽 신화와 중세 독일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와는 기본설정, 캐릭터, 줄거리 등이 많이 다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놓자면, 전 <니벨룽겐의 노래>와 북유럽 신화만 접한 상태에서 아무 사전지식 없이 <니벨룽의 반지>를 봤다가, '원전'과는 다른 캐릭터와 줄거리가 속출해서 황당해하느라,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바그너는 북유럽 신화를 각색한 정도가 아니라, 소재를 대폭 해체해서 재조립한 수준이었으니까요.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발키리는 용맹한 여전사이며, 가장 중요한 신과 최고의 예언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명의 딸입니다. 발키리 중 가장 뛰어난 브륀힐데는 <니벨룽의 반지>의 실질적 주인공인 지크프리트의 연인입니다.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가 유명해지면서, 바그너가 재구축한 모습이 북유럽 신화 원전으로 알게 된 경우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당시만 해도 북유럽 신화는 '아는 사람만 아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지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원전을 각색한 작품이 엄청나게 유명해질 경우, 이런 경우가 흔히 일어나지요. 인기 없던 곡을 리메이크한 곡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면, 리메이크한 곡을 원곡으로 아는 사람도 생기는 것처럼요.
발키리의 이미지가 아주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주요 신의 시녀이며, 신으로서의 위상은 기껏해야 2급 신 정도에 불과했던 발키리가, 졸지에 북유럽 신화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자 용맹한 여전사의 대표 격이 되었지요. '발키리의 기행' 음악이 유명해지면서 더욱 그랬고요. 오딘, 토르, 프레이야 등 북유럽 신화의 신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은 많아도, 용맹한 여전사 발키리라는 이미지를 접해본 사람은 많을 겁니다. 용맹한 여전사 발키리가 등장하는 작품을 통해, 북유럽 신화를 처음 접한 사람도 꽤 많을 테고요. 요즘이야 마블 히어로 시리즈의 <토르> 덕분에 오딘, 토르, 로키의 이름 정도는 접하는 사람이 늘어났는지라, 조금 달라졌겠지만요.
바그너의 <발퀴레>는 신화 각색물이 원전 신화를 유명세와 이미지에서 압도해버린 경우이자, 원래 이야기가 유명한 각색물에 묻혀버리는 메커니즘이 잘 드러난 사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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