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검투사라고 하면, 두 명이 치열하게 싸워 한 명을 제압하면, 관중들이 엄지손가락으로 그 검투사의 운명을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이미지가 뚜렷이 떠오릅니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향하면 살리라는 뜻이고, 아래로 향하면 죽이라는 뜻이라고요.
이런 이미지가 널리 퍼진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낭만적 이상향으로 묘사한 작품을 다수 남긴, 오리엔탈리즘 회화의 거장인 장 레옹 제롬의 작품이 유명해지면서였습니다.
장 레옹 제롬의 1872년 작품, <엄지 뒤집기 Pollice Verso>입니다. 살벌한 표정을 지은 관중들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데, 제압한 검투사를 죽이라는 표시입니다.
이 그림이 인기를 끌면서,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검투사의 운명을 결정했다는 로마 관습 이야기도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도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리는 것은 상대를 살리는 표시, 아래로 돌리는 것은 상대를 처치하라는 표시로 통용될 때가 간혹 있지요.
그런데 실제 고대 로마에는 그런 관습은 없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올린다면, 검투사를 살리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로마인은 없었을 겁니다.
'역사를 창작한 예술'이 아니라 '역사를 변형한 예술' 카테고리에 썼듯이, 아예 없는 것을 창작해낸 것은 아닙니다. 고대 로마에는 관중들이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검투사의 운명을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관습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의미가 정반대였습니다.
고대 로마의 조각품 중에는 검투장과 관중들을 묘사한 작품이 여럿 있는데, 부조에서 검투사가 죽기를 원하는 관중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엄지손가락을 위로 드는 것은 검을 들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것은 검을 내려놓으라는 표시였습니다. 즉 엄지손가락을 위로 들면 칼을 들어 상대를 죽이라는 것이고,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면 검을 내려놓고 패배한 검투사를 살려주라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장 레옹 제롬이 작정하고 로마 관습을 정반대로 왜곡하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롬이 참조한 자료에는 '엄지손가락을 돌리면 검투사를 죽이라는 신호이다'라고만 되어 있었고, 제롬은 이것을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돌린다고 해석한 것이지요.
제롬의 그림이 유명해지고, 그리고 제롬의 그림으로 그 관습에 대해 알게 되거나 제롬의 영향을 받은 다른 예술가들이 그 묘사를 반복하면서, 어느새 엄지손가락 방향 신호는 실제와 정반대로 널리 알려지게 되어 버렸습니다. 제롬의 <엄지 뒤집기>의 사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예술작품의 묘사로 어떤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 얼마나 단단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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