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변형한 예술

셰익스피어가 그린 절대악인 <리처드 3세>

아리에시아 2015. 4. 18. 11:57

리처드 3세(1452-1485)는 잉글랜드 요크 왕조의 3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입니다. 헨리 7세 바로 전의 왕이라고 하는 쪽이 더 빠르겠지요. 15세기 말 잉글랜드에서는 30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나는데, 이 내전을 일컬어 이른바 '장미 전쟁'이라 합니다. 요크 가와 랭카스터 가의 싸움에서 랭카스터 가는 전멸했지만, 랭카스터 가의 방계인 헨리 7세가 요크 가의 리처드 3세 국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데 성공합니다. 리처드 3세는 전투에서 전사했고, 헨리 7세가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 되고 튜더 왕조를 열지요. 이 헨리 7세의 아들이 여섯 명의 왕비를 맞아들이고 그 중 두 명은 처형하며 두 명은 내친 것으로 유명한 헨리 8세이며, 헨리 7세는 엘리자베스 1세의 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리처드 3세는 요크 왕조의 첫번째 왕인 에드워드 4세의 동생입니다. 장미 전쟁에서 요크 가가 승리할 즈음, 에드워드 4세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으니, 클라렌스 공 조지와 글로스터 공 리처드였습니다. 에드워드 4세에게는 에드워드 5세로 불리는 장남과 요크 공 리처드 두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리처드 4세가 죽은 후 대관식을 올린 것은 동생인 글로스터 공 리처드였고, 리처드 3세가 됩니다. 장미 전쟁에서 패배해 리처드 3세가 그렇게 죽으면서 요크 왕조의 남계는 사실상 끝났고, 남은 후손은 대부분 런던탑에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는 헨리 7세와 결혼하여 헨리 8세의 어머니가 되었고요.

 

리처드 3세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입니다.

 

 

한국에서는 별로 유명하지 않습니다만, 영어권에서는 오랫동안 리처드 3세가 극악무도한 악당의 대명사차럼 여겨졌습니다. 헨리 7세는 정통성이 뒤떨어지는 입장에서 현 국왕을 죽이고 새 왕이 된 입장인지라, 리처드 3세를 악마로 묘사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아마 그런 술수는 오래지 않아 묻혀버렸겠지요. 그런 프로파간다는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인물이 연이어 나오면 이내 잊히기 마련이니까요. 로빈 후드 전설에서 탐욕스럽고 무능한 국왕으로 등장하는 존 왕이, 상당히 유명하고 창작물 등에서도 꽤 많이 나오지만, 왕위 다툼으로 자기 조카를 죽였다는 의혹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처럼요. 존 왕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고, 그냥 잊혀진 겁니다. 사자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리처드 3세와 존 사이에는 일찍 죽은 왕자가 한 명 있었는데, 이 왕자는 딸 한 명과 아들 한 명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아들이었던 브르타뉴 공 아서는 존 왕과 왕위를 다투다가 존 왕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사망 기록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존 왕이 평생 유폐시켜, 결혼도 못 하고 후손도 없이 죽었지요. 하지만 로빈 후드 전설에 브르타뉴 공 아서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아서인지, 존 왕이 아직껏 무능한 왕의 대명사로 회자되면서도 조카를 죽였다는 비난은 의외로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안 알려졌거든요.

 

하지만 그 프로파간다를 소재로 한 작품이 너무나 유명해지면서, 장미 전쟁에 대해 잘 몰라도 리처드 3세가 극악무도한 악당이라는 것은 상식처럼 통용되는 상황이 됩니다.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입니다. 리처드 3세를 무찌르고 국왕이 된 헨리 7세의 손녀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 발표된 작품이지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입니다. 실제 인물을 보고 그린 당대의 초상화는 아니며, 셰익스피어의가 생존했던 시절 직접 얼굴을 보고 그린 초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 왕 등 4대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5대 희극으로 불리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십이야, 뜻대로 하세요, 한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등이 유명합니다만, 영어권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역사극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중에는 <존 왕>, <리처드 2세>, <헨리 4세> 1, 2부, <헨리 5세>, <헨리 6세> 1, 2, 3부, <리처드 3세>, <헨리 8세> 등이 있는데, 이 중에 후대에 가장 많은 인기를 끈 작품이 바로 <리처드 3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속에서 리처드 3세는 흉측한 곱추이며, 극악무도한 악당 자체입니다. 악역으로서 인상적인 대사도 여럿 남기지요.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3세가 살아있던 시절 죽은 사람이 있거나 음모가 꾸며진 사례가 있으면, 모두 리처드 3세의 짓이라는 식으로 묘사합니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리처드 3세는 3형제 중 막내로서, 둘째형이 억울하게 처형되도록 음모를 꾸미고, 둘째형이 죽은 이후 국왕인 첫째형이 죽자 첫째형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에게서 왕위를 강탈합니다. 대체 어떻게 그랬냐고요? 큰형은 어머니가 외도해서 낳은 아들이니, 상속권이 없다고 주장해서요! 그리고 첫째형의 아들인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 형제를 런던탑에 수감하고, 얼마 후 대놓고 살해합니다. 그리고 첫째형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려는 계획을 세운 뒤에는, 그 전 단계로 왕비도 독살하죠. 덧붙이자면 그 왕비는 헨리 6세가 국왕이던 시절의 왕세자비로서, 헨리 6세와 왕세자를 죽인 뒤 자신을 저주하는 왕세자비를 데려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 걸까요? 사료가 부족해서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당대 사료에서는 리처드 3세가 곱추라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전장에서 지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날 재판을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묘사된 이른바 '리처드 3세의 악행' 중에서 리처드 3세가 범인으로 판명될 사건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리처드 3세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볼 만한 자료는 전무합니다. 반대로 리처드 3세가 그 시점에서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물리적, 시간적 요소 등으로 불가능하다는 사료나, 리처드 3세가 개입하지 않고 다른 인물들이 그 사건을 일으켰다는 사료는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4세가 어머니 쪽이 외도해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당시에 나오기는 했는데, 리처드가 아닌 클라렌스 공 조지가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에드워드 4세는 외도해서 태어난 아이로 상속권이 없으며, 에드워드 4세가 아닌 자신이 진짜 장남이고,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죠.

 

에드워드 4세의 큰동생이자 리처드 3세의 둘째형인 클라렌스 공 조지는 에드워드 4세의 생전에 이미 여러 번 반기를 들었고, 에드워드 4세는 여러 번 용서해주기는 했지만 사이가 좋지는 못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극에서 묘사된 것처럼, 클라렌스 공 조지는 완전무결한 충신이었다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경우가 절대 아니었죠. 애초에 자기가 후계자 되겠답시고, 큰형은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주장한 사람인걸요.

 

 

리처드 3세가 헨리 6세와 외아들을 죽이고 며느리를 빼앗아 결혼한 뒤 나중에 죽였다는 이야기도 사실과는 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반대의 정황증거는 넘쳐나고요. 리처드 3세의 왕비는 병을 앓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원래 약혼한 사이였는데다가, 헨리 6세와 왕세자가 죽은 이후 왕세자비 쪽에서 먼저 리처드를 찾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리처드 3세의 왕비는 앤 네빌이었는데, 앤의 아버지는 원래 장미전쟁에서 요크 가 파로 에드워드 4세의 동생과 딸을 약혼시켰으며, 그때 리처드와 앤은 약혼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앤의 아버지는 나중에 랭커스터 가에 가담했고, 그 때 랭커스터 가의 헨리 6세의 아들과 자기 딸을 결혼시킨 것이었지요.

 

그리고 헨리 6세가 패퇴해 앤이 과부가 되자, 앤의 형부는 앤을 감금하려 합니다. 앤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상속녀였는데, 당시 상속법상 앤이 아이 없이 죽으면 앤의 언니의 남편은 앤의 유산도 모두 상속받을 수 있었거든요. 당시 법률에서 여성이 상속받은 재산은 그 여성의 남편이 가질 수 있었고, 상속녀가 결혼하지 않으면 그 상속녀의 재산은 남성 가장의 소유였던 것이지요. 앤은 자신을 감금하려는 형부에게서 도망쳐, 리처드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리처드는 앤과 결혼하기로 했지만, 앤의 형부는 그 결혼에 극심하게 반대했습니다. 당시 법에서 앤의 결혼은 앤 본인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남자 친인척인 앤의 형부가 주관하는 사항이었지요. 그러자 리처드는 앤이 물려받을 친정 유산 대부분을 포기하겠다고 제의했고, 드디어 결혼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을 저주하는 여자를 빼앗다시피 결혼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였다는 것은, 이른바 리처드 3세의 악행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힙니다.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리처드 3세에게 씌워진 혐의가 억울하다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죠. 에드워드 4세는 연애결혼을 하기 위해 정식결혼을 하지 않고 몰래 비밀결혼을 한 뒤 나중에 공표했는데, 당시 법률상 이런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에게는 왕위계승권이 없었습니다. 왕위계승권은 온전히 정식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을 때에만 인정되는 것이었지요. 랭커스터 가문의 조상인 에드워드 3세의 세번째 왕자 곤트의 존의 경우, 정략결혼한 두 번째 아내가 죽은 뒤 오랫동안 사랑했던 애첩과 재혼했는데,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도 일단 법적으로 적자로 인정되기는 했습니다만, 왕위계승권만은 부여되지 않는다는 국왕 칙명이 내려진 사례가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 애첩이 낳은 아이들은 친부모가 결혼한 뒤에도 왕실의 성 대신 영지의 이름을 딴 보퍼트라는 성을 썼고, 헨리 7세의 어머니가 바로 이 보퍼트 가문의 마지막 후손입니다. 그리고 후대인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는, 잉글랜드 국내에서 왕위계승권이 가장 높았던 엘리자베스 1세의 5촌 조카인 캐서린 그레이가 비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졌다가, 엘리자베스 1세가 직접 결혼 무효 처리하고 태어난 아이를 사생아로 선포한 사례도 있었지요. 정화수 떠놓고 언약하기만 해도 본인들이 부부로 여기면 부부 취급을 해 주고, 서자도 반쪽이나마 핏줄 대접은 하는 한국 역사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만, 15세기 잉글랜드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국왕이 대놓고 비밀결혼을 했으며, 새로운 왕비는 자기 세력을 늘린답시고 기존 신하와 충돌하거나 그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고는 했습니다.


에드워드 4세 생전에는 왕의 권한이 강력하니 대충 넘어갔습니다만, 에드워드 4세가 죽자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에드워드 4세의 왕비와 에드워드 4세의 신하들은 극심하게 대립했는데,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모후가 섭정하겠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입니다. 훗날 에드워드 5세로 불리는 왕세자는 당시 12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이 정식결혼 절차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 왕세자가 태어났다는 것은, 왕비 일파를 축출하려는 세력에게 더없이 좋은 명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에드워드 4세가 왕비와 비밀결혼을 했을 때, 다른 여성과 약혼한 상태였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당시 에드워드 4세는 엘리노어 버틀러라는 아가씨와 약혼을 했는데, 이 약혼을 정식으로 취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법률에 따르면,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 약혼을 취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상대와 결혼하는 것은 중혼으로 취급되었고 정식 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약혼 상태였을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와 비밀결혼하기 전에 엘리노어 버틀러와 실제로 비밀결혼을 했다는 증언까지 나왔습니다. 비밀결혼이라 증인은 결혼식을 집전한 사제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당사자인 엘리노어 버틀러도 이미 죽은 뒤였는데, 그 결혼을 집전했다는 사제가 나타나 증언한 것이지요. 

 

엘리노어 버틀러와 약혼 상태였다는 것이 과연 사실인지, 그리고 비밀결혼을 주례했다는 사제가 출현했다는 것이 법적으로 결혼으로 인정되는 사안인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논란이 분분합니다. 비밀결혼에는 대개 결혼문서나, 다른 증인 한두 명은 세우기 마련인데, 그 결혼을 집전했다는 주교의 증언 외에 다른 증거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의회에서는 이 증언을 인정했고, 선대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왕비의 결혼이 중혼이니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상속권을 정식으로 박탈하게 됩니다. 왕비가 국왕과 비밀결혼했다는 것만으로도 왕세자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기에는 충분했는데, 법적으로 중혼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더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 된 것지요.

 

결국 신하들은 정식 결혼한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에드워드 4세의 아들에게는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의결하고, 선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을 새 왕으로 모시기로 한 것이지요. 이미 3형제 중 둘째 클라렌스 공 조지는 죽은 뒤였기에,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 리처드에게 순서가 돌아간 것이고요.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런던탑에 이미 와 있었는데,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이 취소되고 리처드 3세가 왕이 된 이후 이 두 아이는 런던탑의 왕족용 숙소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합니다. 그 뒤의 기록이 완전히 끊겨버리지요.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 묘사된 것처럼 리처드 3세가 즉위한 직후 죽인 걸까요?

 

두 형제가 수감된 것이 1483년, 장미 전쟁이 끝난 것이 1485년입니다. 장미 전쟁이 끝난 뒤에 두 왕자가 모습을 드러낸 적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고, 정황상 그 즈음에 이미 죽었던 것 같기는 한데,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는 것이 현재 연구된 정황입니다. 두 왕자가 죽은 것이 리처드 3세 생전인지조차 불명확한 상황이지요. 두 명이 거의 동시에 사라진 것을 보면 자연사나 병사일 가능성보다는 살해당했을 공산이 높다는 것 정도가 고작입니다.

 

두 왕자가 살해당했다면, 살해범으로 물망에 오르는 후보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오랫동안 알려졌던 것처럼 리처드 3세나 측근이 리처드 3세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겨셔 선왕의 아들을 제거했다는 설, 리처드 3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귀족이 두 왕자를 살해했다는 설, 그리고 장미 전쟁을 끝내고 승리자가 된 헨리 7세나 측근이 새로운 국왕으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선왕의 핏줄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죽인 건지, 정말 살해당한 게 맞기나 한 건지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정 혐의자에 대해, 정황증거를 이러저러하게 해석하면 두 왕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추측 섞인 변호만이 있을 뿐이죠. 리처드 3세 입장에서 조카인 두 왕자는 이미 왕위계승권이 없는 처지였으니 일부러 죽일 이유가 없다고 추측하거나, 두 왕자의 누나인 요크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헨리 7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는데, 헨리 7세가 정말 두 왕자를 죽였다면 동생을 두 명이나 죽인 남자와 과연 결혼했겠냐고 주장하든가, 대략 이런 식의 추측이 고작입니다. 어디까지나 정황증거고, 유죄의 증거는 될 수 없지만 무죄의 증거도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르는 법률재판에서라면 아마 무죄가 나오겠지만, 진상을 추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료입니다.

 

 

현재로서는 두 왕자가 설사 리처드 3세 때 살아남았다고 해도, 헨리 7세가 왕이 되면서 어차피 죽였을 거라는 추측이 정설입니다. 헨리 7세는 국왕이 되어 튜더 왕조를 연 후 요크 왕가의 핏줄을 제거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고, 거의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장미 전쟁이 끝나던 시기에 살아있던 요크 가문 태생의 왕족 중 헨리 7세 치하를 무사히 넘긴 사람은 헨리 7세가 즉위하기 이전에 다른 집안으로 시집간 딸들,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 그리고 클라렌스 공 조지의 딸인 마거릿 플랜태저넷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제거되었지요. 특히 잉글랜드에 있던 요크 가문의 남자들은 장미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원 런던탑에 평생 유폐되었고, 갇힌 뒤에는 사소한 꼬투리를 빌미로 처형되거나, 혐의가 없으면 혐의를 만들어서라도 처형되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의 딸들은 헨리 7세의 아내와 처제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조지의 딸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잉글랜드에 있던 요크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죽인 셈이지요.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거릿 플랜태저넷도 헨리 7세의 아들인 헨리 8세 때, 명백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고요.

 

하지만 이것은 헨리 7세가 두 왕자가 살아있었다면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증빙은 되어도, 정말로 살인범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새 왕이라면 틀림없이 죽였을 거라는 것이, 그 이전의 왕은 절대 죽이지 않았을 거라는 말은 되지 않으니까요. 현재로서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입니다. 단정할 수 있는 건, 리처드 3세가 두 왕자를 죽였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뿐입니다. 유력한 추측까지 동원해도, 리처드 3세가 두 왕자를 굳이 죽일 이유도 없고 죽여서 이득 될 것도 없다는 것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리고 이건 다른 혐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지요. 두 왕자를 살해했다고 의심받는 사람은 여럿 있지만, 그 의심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은 전혀 없으며, 두 왕자가 살해당했다는 물증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는 강렬한 악인이 등장하는 작품으로서 너무나도 유명해졌고, 리처드 3세는 영미권에서 악인의 대명사가 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나오는 묘사가 실제 역사처럼 퍼지게 되었지요. 셰익스피어 사극의 묘사는 역사적 전거가 없거나 오히려 정반대로 왜곡한 이야기가 가득했지만, 이내 묻혀버린 것이지요. 진실을 면밀하게 검증하고 복잡하게 규명하는 것보다, 그저 유명하고 더 자극적인 이야기에 귀가 쏠리는 사람은 많았으니까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사치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없는 악녀라는 이야기가 그토록 널리 퍼졌던 것처럼요.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는 갖가지 음모를 꾸민 악당이 결국 파멸하는 이야기로는 너무나도 강렬하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셰익스피어의 사극은 역사적 전거가 없다는 말은 이내 가냘프게 묻혀버리지요. 19세기 이래로 영어권 역사학계에서는 리처드 3세가 악인이 아니고 두 왕자를 죽였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 이미 정설로 자리잡았지만, 역사학도가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가 실제 역사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3세 무죄설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퍼지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또다른 문학작품이었습니다. 바로 1951년 조지핀 테이가 발표한 <시간의 딸>이라는 추리소설입니다.

 

조지핀 테이의 <시간의 딸> 초판본 표지입니다.

 

 

<시간의 딸>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주인공이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심심풀이 삼아서 리처드 3세의 역사적 사료에 대해 조사해봤는데, 리처드 3세의 악행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역사적 전거가 희박하거나 오히려 반증하는 자료만 넘쳐나더란 것입니다. 처음에는 좀 미심쩍은 정도였는데, 당시의 사료 등을 상세하게 조사할수록 리처드 3세는 결백하다는 심증만 강화되는 구도로 전개됩니다. 법률로 재판하면 무죄가 나올 것이 확실하며, 정황증거조차도 희박하다는 것이지요. 병상 위에서 접할 수 있는 문서자료만으로, 치밀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묘사된 소설입니다.

 

<시간의 딸>은 한국에서는 2014년에야 완역본이 나왔지만, 영어권에서는 매우 유명한 작품입니다.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시대초월 미스터리작품을 선정했을 때 1순위에 뽑히기도 했으며, 미국에서도 비슷한 순위를 선정했을 때 4위에 뽑힌 적 있습니다. 리처드 3세 재평가론이 역사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도 유명해진 것은 오로지 이 책의 공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평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오히려 이 책이 너무 유명해지면서, 증거가 모호해서 리처드 3세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고 불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는 사안은, 무조건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풍조가 생겨난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장미전쟁이 끝나고 500년이 훨씬 넘게 흐른 2012년, 레스터의 한 교회 주차장에서 한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골은 DNA 검사 등을 통해 리처드 3세의 유골이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유골이 발견되고 3년여가 흐른 2015년 3월 26일, 리처드 3세의 장례식이 대대적으로 치러지고 국왕의 예우로 정중히 안장됩니다. 그리고 리처드 3세의 무덤은 레스터 교회에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신이 더 일찍 발견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튜더 왕조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믿던 시대에 발견되었다면, 국왕 예우의 장례식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며, 오히려 사람들이 훼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골이 발견된 때는 2012년이었고, 리처드 3세를 더 이상 극악무도한 악인으로 여기지만은 않게 된 시대였지요.

 

이른바 리처드 3세 악행이라는 것 중 리처드 3세가 했다는 증거가 있는 사례는 거의 없다는 것은,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치했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전쟁비용 등으로 생긴 지출을 세금으로 떠넘겨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수준의 '역사적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오로지 <시간의 딸> 때문이든,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과 실제 역사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든, 마리 앙투아네트 동정론처럼 무작정 통념을 따르기보다 역사적 사료와 검증해보는 움직임이 자리잡은 시대이기 때문이든 간에,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역사적 사실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 것이지요.

 

 

세익스피어가 리처드 3세를 왜곡했다고 매도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에게 여러 모로 불합리한 조처일 것입니다. 창작의 자유나 극적 허용을 떠나서, 셰익스피어가 살던 튜더 왕조 시대에는 엄연히 리처드 3세가 절대악인이라는 것이 사실로 통용되고 있었으니까요. 헨리 7세는 리처드 3세를 무찔렀다는 이유만으로 계승권이 희박한데도 왕이 되었고, 그 반대급부로 리처드 3세가 다시 없을 흉악무도한 악한이라는 것을 널리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헨리 7세의 손녀인 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리던 셰익스피어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저 자신의 시대에는 사실로 알려졌던 것을 소재로 삼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가 그토록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아마 리처드 3세가 오늘날까지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겠지요. 세월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면서, 옛날 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잊혀졌고,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알고 있는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존 왕이 왕위다툼하던 조카를 죽였다는 의혹이 오늘날에는 거의 회자되지 않는 것처럼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 혹은 이에 더해 조지핀 테이의 <시간의 딸>은 역사를 소재로 삼은 예술작품이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백번 노력해 아무리 공들인 학술서적을 내놓아도, 인기를 끈 작품의 묘사를 실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