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변형한 예술

<박씨부인전>과 병자호란

아리에시아 2016. 8. 20. 11:52

<박씨부인전>은 <박씨전>이라고도 불리는 고전소설로, <명월부인전>이라는 제목으로 된 판본도 있습니다. <박씨부인전>은 <홍길동전>과 더불어, 현대인에게도 친숙하고 현대에도 널리 각색되고 있는 고전소설입니다. 여성이 유능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맹활약한다는 점이 크게 어필했다는 것, 명쾌한 구성과 통쾌한 결말 등이 인기 요소로 꼽힙니다.


'박씨전'의 연세대학교 소장 판본의 첫 장입니다. 현재 <박씨전부인>의 표준판본처럼 여겨지고 있는 판본입니다. 사진 출처는 한국학술중앙연구원입니다.



<박씨부인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조참판의 외아들인 이시백은, 아버지로부터 금강산의 도사인 박 처사라는 사람의 딸과 자신의 혼담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통보받습니다. 당시에는 부모나 집안 어른이 자녀의 혼처를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이시백은 신부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정한 신붓감과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결혼식날에야 신부를 처음 보는데, 흉측하다는 표현이 차라리 어울릴 정도로 못생긴 외모였습니다.


이시백은 박씨부인의 외모에 기겁했고, 박씨부인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꺼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씨부인은 시댁에 있으면서도 남편과 떨어져, 피화당이라는 이름의 별당에서 별거하다시피 외롭게 지내게 됩니다. 그 와중에 박씨부인은 영험한 도술과 예언 능력 등을 발휘하여 남편 이시백을 다방면으로 도왔고, 박씨부인의 내조를 받은 이시백은 장원급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시백이 장원급제하자, 박씨부인의 아버지인 박 처사가 박씨부인에게 나타나, 이제 허물을 벗을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박씨부인이 허물을 벗자, 아름다운 외모가 드러납니다. 이시백은 아내 덕에 장원급제했을 때에도 박씨부인에게 떨떠름하다가, 희대의 미녀로 등장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데, 이 대목은 흡사 억울하게 괴롭힘당하던 사람이 자길 괴롭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출세한 장면을 보는 듯한 통쾌한 감정을 독자에게 안겨줍니다. 


그리고 이 즈음에서, <박씨부인전>의 무대는 양반댁 안에서 부부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의 스케일을 넘어, 조선 조정과 외국의 이야기로 스케일이 커지게 됩니다.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박씨부인은 영험한 능력을 발휘하며, 청나라 장수 및 군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합니다. 박씨부인이나 몸종 계화가 직접 패퇴시킨 상대만 해도 청나라 장군 용골대의 동생인 용홀대, 청나라의 공주로서 도술을 사용해 이시백을 암살하려 했던 기룡대 등 청나라의 중심인물들입니다. 그리고 박씨부인의 활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의 왕세자와 왕자들을 인질로 끌고가려던 계획을 취소하며 물러가고, 조선과 청나라의 전쟁은 마침내 조선이 승리하면서 결말을 맺습니다.



박씨부인전 시절의 조선 국왕은 인조이고, 청나라의 조선침략군 장군은 용골대라는 이름이며, 청나라는 조선의 왕세자와 왕자들을 인질로 끌고 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조선 장군 중에는 임경업이라는 이름의 장군도 있으며, 이 장군도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합니다. 이런 요소에서 알 수 있듯이, 박씨부인전 후반부의 '전쟁'은 현실의 병자호란을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실제 전쟁을 배경으로 실존인물이 여럿 언급되는 데에도 '소재로 삼았다'가 아니라 '모티브로 삼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박씨부인전> 속에 묘사된 전쟁은 실존인물 이름이 약간 등장하는 것 외에는 실제 역사적 사건인 병자호란과 굉장히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정반대로 흘러간다고 해도 무방하지요.



병자호란은 1636~1637년 동안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당시 조선 국왕은 16대 왕 인조로서, 15대 국왕이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국왕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습니다. 광해군은 외교에서 명나라 편을 드는 척 했다가, 청나라 편을 드는 척 했다가를 반복하는 길을 취했습니다. 이를 두고 청나라 측에서는 조선이 대놓고 명나라 편을 드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조선이 박쥐 같은 행동을 한다며 고까운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광해군 시기 청나라 초대 황제였던 누르하치는 공식적으로 전자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왕이 된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3년이 지난 뒤, 초대황제 누르하치가 죽고 2대 황제가 된 청태종 홍타이지는 후자의 인물이었습니다. 홍타이지는 광해군 시절 광해군의 외교를 청나라 입장에서 불만스러운 것이라 여기고 있었고, 청나라 황제가 되자 조선을 침공하려고 작정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행동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결국 정묘년인 1636년, 기어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맙니다.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의 도성인 한양을 금세 함락했고, 인조는 한양을 벗어나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는 길을 택합니다. 하지만 당시 남한산성에는 50일 분의 식량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태의 원인은 실로 어처구니없는데, 총책임자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백성들과 군인들을 힘들게 한다는 이유로, 산성의 식량창고를 성 안이 아닌 성 밖에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의 조선군들은 청나라에 농성했고,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식량이 바닥나자 더 이상 농성을 이어갈 수는 없었고, 결국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것을 일러 '삼전도의 치욕'이라 합니다.


조선은 국왕이 항복 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청나라와 전쟁을 주장했던 주요 중신 및 많은 백성 포로들이 청나라에 끌려갔고, 인조의 장남과 차남도 청나라의 인질이 되었습니다. 인조의 장남이자 왕세자였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끌려간 뒤 청나라 중신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친교를 쌓았는데, 인조는 이를 보고 소현세자를 적대시하게 됩니다. 왕세자 일행이 청나라 인질이 되고 8년이 지난 후, 청나라는 비로소 왕세자 일행의 귀국을 허락하여, 소현세자 일행은 장장 8년만에 조선에 돌아옵니다. 하지만 인조는 대놓고 소현세자 부부를 싸늘하게 대했고, 귀국 직후 소현세자가 병을 앓다 죽자 관례와 달리 어의를 문초하지도 않고 장례식을 허겁지겁 치르며, 세자에게 아들이 있는데도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웁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강씨에게는 난데없이 사약을 내리고, 소현세자의 아이들도 제주도에 귀양을 보냅니다. 당시 제주도는 산수갑산을 능가하는 험한 환경으로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명은 제주도에 귀양간 지 1년도 되지 않아 풍토병으로 죽었고, 막내인 경안군 이석견만이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인질생활 당시 포로가 된 조선백성을 풀려나게 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고, 청나라 최신문물 및 청나라에 있던 서양 문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런 모습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이를 오히려 대놓고 경계하며 적대시했고,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태도는 오늘날 인조에 대해 극도로 나쁜 이미지가 형성된 데 대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의 '삼전도의 치욕'을 증거하는 당대의 유물인 삼전도청태종공덕비입니다. 삼전도비라는 약칭으로 훨씬 더 널리 불립니다. 삼전도의 치욕 당시 조선에서 청나라 황제를 칭송하는 문구를 새긴 비석을 조성하라는 압력을 받자, 그 지시대로 따라 만들어진 비석입니다. 삼전도의 치욕 그 자체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비석을 훼손하려는 시도도 종종 일어났을 정도입니다.


사적 제 57호로 지정되었고, 지난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된 남한산성의 모습입니다. 남한산성은 훌륭한 기술로 건축된 성곽 유적이며, 병자호란 때에도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농성하는 데 성공했고, 결코 함락당하지는 않았던 곳입니다. 하지만 '삼전도의 치욕'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나머지, 친일파 유적지처럼 인식되는 일이 종종 있으며, 한 술 더 떠 복원 및 보존 프로젝트라고 하면 항의하는 민원이 종종 제기되는 등의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나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뒤에는, 남한산성에 대해 대놓고 반감을 표출하는 일이 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박씨부인전>에서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조선의 왕세자와 왕자들이 청나라의 포로가 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 반대였지요. 전 유치원 시절 전래동화책으로 <박씨부인전>을 먼저 읽고, 조선 역사 및 병자호란 이야기는 10대 초반이 되어서야 역사책으로 읽었더랬습니다. 처음에 역사책에서 용골대니 조선 왕세자 인질 요구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길래 <박씨부인전>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박씨부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조선이 패배하고 조선의 왕세자 일행이 인질로 끌려갔다는 결말을 보고, 멍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조선이 이기고 세자 일행은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는 것 아니었어?" 라고요. <박씨부인전>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박씨부인이 청나라더러 조선 세자 일행을 당장 풀어주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으니까요. <박씨부인전>을 먼저 접하고 병자호란 이야기를 나중에 알게 된 사람이, 그 반대의 순서를 밟은 사람보다 훨씬 많을 듯한데, 아마 이런 경험을 해보신 분도 여럿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