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역사

베르디의 <운명의 힘>과 잉카 제국의 운명

아리에시아 2015. 1. 17. 11:45

베르디의 <운명의 힘 La forza del Destino>는 운명에 농락당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기구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무대는 1750년 즈음, 에스파냐의 세비야에 있는 칼라트라바 후작의 저택입니다. 여주인공 레오노라는 칼라트라바 후작의 딸로써, 남주인공 돈 알바로를 사랑하지만 혼인을 허락받지 못한 처지여서 야반도주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단 둘이 있는 타이밍에 칼라트라바 후작이 들어오고, 돈 알바로는 아무 적의 없다는 뜻으로 들고 있던 권총을 내전지지만, 오히려 오발 사고로 후작이 죽게 되지요. 어쩔 줄 모르던 레오노라와 돈 알바로는 도망치고, 얼마 후 헤어지고 맙니다.

 

한편 칼라트라바 후작의 아들이자 레오노라의 오빠인 돈 카를로는 어떻게든 두 명에게 복수하려고 벼르면서, 두 명을 찾아 곳곳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 동안 레오노라는 수도원에 들어가 가장 극심한 고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5년 후, 돈 카를로는 그 동안 수도사가 된 돈 알바로를 찾아가 결투를 신청하고, 그 동안 둘은 레오노라가 홀로 고행하는 동굴까지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돈 카를로와 돈 알바로는 서로 결투하다가 죽고, 무슨 소리가 들리자 레오노라가 동굴에서 나와 그 마지막 장면을 보게 되지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우연에 우연에 또 우연이 자꾸만 겹치는 구조입니다만, 베르디의 음악이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을 경우, 당사자의 암담하고 비극적인 심정"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새 끌려들어가게 됩니다.

 

 

http://www.ktv.go.kr/program/contents.jsp?cid=321326

 

위의 링크는 2009년 11월 2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오페라단이 공연했던 <운명의 힘> 공연 영상입니다. 돈 알바로 역에 테너 이병삼, 레오노라 역에 소프라노 임세경, 돈 카를로 역에 노희섭, 프레치오실라 역에 메조소프라노 양송이, 구아르디노 역에 베이스 유지훈입니다. Ktv 공연초대석에서 방영되었기 때문에, 프로그램 길이인 80분에 맞춰서 여러 장면이 편집된 영상입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 Pace Pace mio Dio>입니다. 4막짜리 작품에서 여주인공 레오노라는 3막이 시작될 때쯤에 수도원에 들어가, 4막 끝날 즈음에 저 아리아를 부르면서 재등장합니다. 하지만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가 워낙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여주인공이라는 존재감이 없다는 감상은 들지 않지요.

 

 

이렇게까지만 놓고 보면 돈 알바로는 무슨 뜨내기 평민 출신이라도 되어서 후작 가문과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설정은 흔하니까요. 하지만 막상 돈 알바로의 신분에 대해 극에서 묘사되는 것을 보면, 종잡을 수 없게 됩니다. 돈 알바로는 자신이 잉카 왕족의 후손이며 원래라면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고귀한 핏줄이니 핏줄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돈 카를로는 명식이 왕족 후예라는 돈 알바로를 오히려 대놓고 무시하고 있거든요. 극에 묘사되는 것을 보면 돈 알바로가 왕손을 사칭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후작이면 귀족 가문이 되는데, 아무리 자기 나라 왕족이 아니라고 해도, 명색이 왕손인데 대놓고 멸시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유럽이면 왕족의 핏줄을 매우 고귀한 것으로 여겼으며, 왕실이 멸망했다고 해도, 생존자가 망명하면 계승권은 없을지언정 일단 왕족 대우는 해 주던 곳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왕실이 없어지고 왕족이 망명한 21세기 오늘날에도 옛 왕족의 후예면 나름대로 대접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니, 저 때는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돈 알바로의 조상이 다스리던 나라라는 잉카는 남아메리카에 있던 나라입니다. 현재의 페루와 칠레 쪽에 있던 국가지요. 세계지리를 살펴보자니, 더욱 종잡을 수 없습니다. 무대는 분명 유럽의 에스파냐인데, 난데없이 아메리카를 다스라던 왕족의 후예가 등장하다니요? 그리고 에스파냐 귀족 가문은 왜 왕족 핏줄을 고귀하게 여기던 시대에 잉카 왕손을 저렇게 함부로 대하는 걸까요?

 

 

잉카 제국은 에스파냐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세계사를 상식 수준에서 정리할 때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이 반드시 들어가지만, 그 이후 콜럼버스를 후원했던 에스파냐에서 정복군이 와르르 쏟아져들어가 아메리카에 있던 문명을 초토화시켰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을 때가 많지요. 아스테카/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이 바로 그렇게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왕실의 후손들 중 남자는 살해당하고, 여자는 잉카 지역에 있던 에스파냐인들이 첩으로 삼거나 그 이하의 대우를 했습니다. 이런 운명은 비단 왕족들뿐만 아니라, 잉카 제국의 모든 백성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당시 유럽권에서는 멸망한 왕가의 후손도 명문가의 핏줄 정도의 대우는 해 주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유럽인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사람'이라고 인식하지 않았고, 왕족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잉카 왕족의 피가 섞였다는 것은 유럽에서 왕족 대우를 받을 일이 전혀 아니었으며, 잉카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복속시킨 에스파냐에서는 더더욱 그랬던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운명의 힘>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750년대에 잉카 왕족 후손이라면 잉카 왕족 여성과 그 여성을 첩으로 삼은 에스파냐 정복자 사이에서 태어났을 수밖에 없으니, 더욱 그렇고요. 돈 알바로에게 잉카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에스파냐에서는 왕손 대우는커녕 변변한 귀족 대우조차도 못 받는 처지였던 것이지요. 덧붙이면 200년도 더 전에 멸망한 왕실이라는 것 자체는, 유럽 관점에서는 왕손을 자칭하는 데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후계 계승 순위와 족보만 명확하면, 몇백년 전에 멸망한 왕실의 후손도 왕족 후예 대접은 해 주는 풍토가 있었으니까요.

 

 

이런 운명은 돈 알바로 같은 기구한 운명의 후손들이 태어나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에스파냐 남자-아메리카 원주민 여자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주요 인구가 됩니다. 이 혼혈을 일러 메스티소라 합니다. 이런 메스티소들은 유럽의 백인들에게서 철저하게 멸시당했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아무리 혼혈이라도 명색이 자기 쪽 피가 섞였는데 그렇게까지 차별대우를 했을지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혈통도 2등 국민 취급하곤 했습니다. 식민지 관리 등의 명목으로 식민지에 머무르는 백인들이 많았는데, 거기세 태어나고 자란 백인 2세를 유럽 본국에서는 대등한 백인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물며 자신들이 정복하고 노예 취급했던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후손은, 더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