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 Die Fledermaus> 는 왁자지껄한 소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유쾌한 작품입니다. <박쥐>의 2막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빈에서 러시아 고위귀족인 오를로프스키 공이 무도회를 개최하는데, 한 집안에서 무려 세 명이 다른 사람인 척 가장하며 이 무도회에 참석합니다. 아이젠슈타인 남작, 남작부인 로잘린데, 남작댁의 하녀 아델레, 세 명이 각각 따로 가명을 쓰며 무도회에 참석한 것이지요.
아이젠슈타인 남작은 친구와 함께 프랑스인인 르나르 후작이라는 이름을 대면서, 독일어에 서투른 것처럼 일부러 쉬운 독일어 단어를 틀리게 말하며 외국인인 척 합니다. 주인마님의 옷을 몰래 입고 온 아델레는 아이젠슈타인 남작/르나르 후작이 자기네 집의 하녀와 닮았다고 말을 하자, "이렇게 우아한 아가씨인 저를 보고 하녀를 떠올리시다니, 후작님은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호호!" 라면서 능청을 부립니다. 이 때 하녀 아델레가 능청부리면서 부르는 아리아가 이 오페레타에서 가장 유명한 <친애하는 후작님 mein herr marquis>입니다. 남작부인 로잘린데는 헝가리에서 온 백작부인으로 가장하면서, 헝가리 출신이라는 증표로 헝가리 민속음악인 <차르다시 csardas>를 부릅니다. 프랑스인 르나르 후작으로 가장한 아이젠슈타인남작은 완벽하게 속아넘어가서, 아내와 하녀를 못 알아보고 정말로 헝가리 백작부인과 양갓집 규수라고만 생각하게 되고 말지요. 나중에 3막에서는 왁자지껄 요란한 해프닝 끝에 모든 것이 밝혀지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무도회장에서는 정말로 눈치를 못 챘습니다.
국립오페라단에서 2012년 11월 29일에 공연한 <박쥐> 공연영상입니다. 19세기 말의 오스트리아 빈이 아니라, 현대로 배경을 옮긴 연출입니다.
<친애하는 후작님>은 1부 1시간 20분 50초 경, <차르다시>는 1부 1시간 18분 40초경 시작됩니다.
그런데 무도회 장면에서 '헝가리 백작부인' 장면의 묘사에서, 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다. 러시아에서 온 오를로프스키 공이나 '프랑스 후작'은 외국인이라는 언급이 나오며, 연회 손님들은 외국인 손님이 오셨다는 말에 호기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손님들은 헝가리 백작부인을 대할 떄는, 딱히 외국인으로 대하지는 않습니다. 아이젠슈타인이 변장한 '프랑스 후작'이 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와, 반응이 확연히 다르지요. 관심과 호기심이 섞인 반응을 보이기는 하는데, 외국인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에 훨씬 더 가까운 느낌을 줍니다. 오를로프스키 공과 '프랑스 후작'등 다른 외국인 손님에 대한 반응과 비교해보면, 특히 그런 면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지요.
<박쥐>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왕가가 다스린다고만 말하기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대대로 혼인동맹으로 많은 속국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헝가리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헝가리 국왕과 합스부르크 황실의 황녀를 결혼시키면서, 헝가리 국왕이 후사 없이 죽을 경우 합스부르크 황실이 헝가리 왕위를 잇는다는 조건을 달았는데, 국왕 라요슈 2세가 후사 없이 전쟁터에서 죽어버렸거든요. 많은 땅을 라요슈 2세를 전사시킨 오스만 투르크 세력에 전쟁으로 빼앗기기는 했지만, 합스부르크 황실은 헝가리를 합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합스부르크 황실의 군주는 헝가리 국왕도 겸하게 되지요.
오스트리아에는 이런 식으로 상속녀와 결혼해서 합병하게 된 나라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인구 비율로 따져보면,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는 오스트리아인보다 이처럼 합병된 외국계 주민이 더 많을 정도였지요. 주민들 입장에서야 졸지에 다른 나라 속국이 된 셈이었지만, 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상속법에 따라 합병된 것이라 반대할 명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자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더욱 큰 원인은 민족주의였습니다. 민족주의는 처음에는 같은 민족끼리 결속하자는 취지가 강했다가, 조금씩 독립하자는 움직임으로 변모했습니다. 상속법에 따라 합병되었다는 명분도 사람들의 정서에는 효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수백 년 전 국왕이 결혼한 것 때문에, 왜 대대손손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하냐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하면서요.
헝가리는 이러한 분리독립세력이 가장 강대한 곳이었습니다. 인구도 많았고, 독립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도 충분했으며, 독립운동도 활발했습니다. 이런 분리독립 움직임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우가 나빠지자, 오히려 분리독립운동이 더 활발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요.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가 명목상 오스트리아 황제를 군주로 모시고, 나랏일의 최종결정권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진다는 것을 수용하면, 사실상 헝가리 자치를 인정해주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오스트리아 황제를 상징적 지도자로 모시는 시늉만 하면, 헝가리 국정은 헝가리 인들이 뽑은 사람들로 운영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양국의 지배층은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불리게 되지요. 사실상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본국과 거의 동동한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해서는 꼬박꼬박 외국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던 <박쥐>의 무도회 손님들이, 헝가리에서 온 손님에게는 외국인이라는 의식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색적인 풍속을 지닌 다른 지역 정도의 인식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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