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3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였던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21살에 죽었습니다. 원래라면 마르가리타 황후라는 존재는 연대기 작가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관심 없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본인은 유명한 일화를 남긴 적도 없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독보적인 인상을 준 적도 없습니다. 왕실에서 태어나 국가와 왕실 가문이 결정한 상대와 결혼했고, 그게 인생의 거의 전부였으며, 고작 21살에 끝이 났지요. 그렇다고 유명한 후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네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아이는 딸 한 명뿐이었고, 그 딸도 후손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황제 레오폴트 1세는 곧바로 재혼했고, 마르가리타가 죽은 뒤에도 잊지는 않았다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마르가리타가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한 직후 그려진 초상화로, 레오폴트 1세의 초상화와 짝을 이룹니다. 가장 무도회 식으로 의상을 차려입은 모습을 묘사한 초상화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마르가리타는 역사상 손꼽히는 유명한 왕실 여성이 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로서보다는, 결혼 이전의 신분인 에스파냐 왕국의 마르가리타 왕녀로서 훨씬 더 유명하기는 하지만요. 바로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궁정의 시녀들 Las Meninas 라스 메니나스> 덕분입니다.
가장 수수께끼같은 명화를 꼽으라면 거의 1순위로 꼽히는 그 작품, <궁정의 시녀들>입니다. <라스 메니나스>라는 원어 발음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이 그림은 마르가리타 왕녀가 5살 때 그려졌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봐도 멋지고 인상적인 그림이지만, 조금만 파고들어 보면 수수께끼가 마구 떠오르며 솟아납니다. 맨 왼쪽에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는 사람이 화가 벨라스케스로, 에스파샤 회화 거의 최초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 있는데- 지금 누굴 그리고 있는 걸까요? 작품의 정중앙에 있는 것은 마르가리타 왕녀고, 왕녀가 주인공 같지만, 벨라스케스가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는 마르가리타 왕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요. 그럼 관객의 위치에 있는, 그림에 나타나지 않는 또다른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대체 누구고, 왜 왕녀가 와 있는 걸까요?
그림 정중앙, 문 바로 옆쪽에는 두 명이 그려진 화상을 담고 있는 틀이 있습니다. 이 두 명은 마르가리타 왕녀의 부모인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4세와 왕비 마리아나입니다. 이 틀은 그림일까요, 아니면 거울일까요? 그림이라면 위풍당당한 국왕 부처의 초상화인데 너무나도 작고 복닥복닥하게 그린 점이 이상합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라면, 현재 방 안에 국왕 부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그림 바깥, 관객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마르가리타 왕녀를 비롯해 다른 인물들의 모습은 하나도 비치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요. 그럼, 혹시 벨라스케스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저 거울에 비친 국왕 부처의 초상화이고, 거울에는 그 일부만 비친 걸까요? 그렇다 해도, 빛이 반사하는 각도가 맞지 않습니다. 그림 앞에 있는 화가는 거울에 안 비치는데, 화가보다 멀리 있는 그림은 거울에 비친다는 게 되어버리니까요.
이 그림의 정말 대단한 점은, 언뜻 보면 좀 산만해 보이는데, 그림에 그려진 것 중 하나라도 빼버리면 곧바로 균형이 무너져 보인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그림의 정중앙 위치에, 문을 열고 서 있는 남자입니다. 이 남자는 마르가리타 왕녀 일행도 아니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지만, 이 위치에 문과 남자를 그려넣지 않았다면 그림의 인상이 뒤바뀝니다. 문이 열려 있으면서 밖의 빛이 들어오고 있고, 동시에 웬 남자가 서 있으면서 그 빛을 막고 있어 빛이 언뜻언뜻 비치게만 하고 있는데, 정말 절묘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열려 있는 문 대신 벽이나 액자를 그려넣으면 그림이 답답해 보이고, 남자 없이 문이 열려진 모습만 그려져 있다면 그림의 중앙이 뚫린 느낌을 주게 되지요. <궁정의 시녀들>은 이런 부분으로 가득합니다. 난쟁이 여인, 개와 장난치는 소년은 전혀 의미 없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없다고 생각하면 그림의 무게중심이 마르기리타 왕녀 쪽에서 옆으로 쏠려버립니다.
<궁정의 시녀들>이 유명해지면서, 마르가리타 테레사도 덩달아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르가리타 왕녀의 일생, 나아가 당시 에스파냐 왕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아마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를, 마르가리타 왕녀의 남동생으로 처음 알게 된 분도 많을 겁니다. 마르가리타의 부모가 외삼촌-조카 관계였다는 것을 통해,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분도 있을 테고요.
펠리페 4세의 뒤를 이은 다음 국왕이자 마르가리타의 남동생인 카를로스 2세입니다. 사촌끼리 결혼하는 근친혼을 대를 이어 거듭하다 보니, 성장지체에 불임이었으며, 결국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는 끊기게 됩니다. 한편 카를로스 2세의 큰누나인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 루이 14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 마리 테레즈가 되었는데, 그 누나의 둘째 손자가 카를로스 2세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왕 펠리페 5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근친혼이 얼마나 심했냐면.... 원래라면 16명이어야 할 고조부모가 겨우 여섯 명이었고, 그 중 세 명이 서로 형제자매 관계였습니다. 고조부모의 윗대가 단 두 명, 오직 한 커플이었던 겁니다. 카를로스 2세의 근친계수는 0.254로 측정되었는데, 이것은 부모자녀 간의 혈연관계보다 더 수치가 높습니다. 이 수치는 친누이인 마르가리타 왕녀도 동일합니다. <궁정의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의 필치로 그려진 발랄한 5살 소녀만 기억하다가, 성장한 뒤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를 보고 충격받았다는 분이 은근히 많은데, 그 극심한 근친혼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습니다.
<궁정의 시녀들>에는 카를로스 2세와 관련된 비화가 하나 있습니다. 특수촬영을 했더니, 이 작품에 처음 그려진 밑그림은 마르가리타 왕녀가 왕위계승자의 포즈를 취한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 밑그림을 그린 뒤, 나중에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궁정의 시녀들>이 덧그려진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마르가리타 왕녀가 국왕의 장녀로서 다음 군주로 여겨지고 있었으나, 5살 무렵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면서 마르가리타 왕녀의 후계자 지위는 사라졌기에, 원래 초상화 계획을 취소하고 새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벨라스케스는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그렸고, 그 걸작의 주인공도 덩달하 유명해지게 했습니다. 원래라면 아들도 없고 후손도 없이 죽은 마르가리타는 허다한 황후 중의 한 명으로나 여겨졌겠지만, <궁정의 시녀들> 덕분에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뮤즈 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그리고 마르가리타에 대한 관심은,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와 역사에 대해 알게끔 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궁정의 시녀들>이 있는 한, 마르가리타 왕녀가 5살 때의 그 풍경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마르가리타 왕녀라는 존재도, 그림에서 묘사된 시녀와 난쟁이 등 당시 에스파냐 궁정의 풍속도, 그림에 새겨진 수많은 수수께끼도, 그 외의 많은 것들도요. 마르가리타 테레사 왕녀 역시 언제까지나 기억되겠지요.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로서가 아니라, 벨라스케스가 그려낸 5살 천진한 소녀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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