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1832년 6월 파리 봉기

아리에시아 2014. 5. 10. 11:53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이후 백여년 동안의 프랑스 역사는 도표로 축약해 놓으면 어리둥절하기 그지없는 연대기가 됩니다. 대략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792 루이 16세 처형, 왕정 폐지, 공화국 수립

1804 나폴레옹 황제 즉위

1814 나폴레옹 퇴위, 루이 16세 동생 루이 18세가 프랑스의 새 왕으로 즉위

1824 루이 18세 사망, 동생 샤를 10세 즉위

1830 7월 혁명. 샤를 10세 폐위, 친척인 루이 필리프를 새 왕으로 옹립

1848 2월 혁명. 루이 필리프 폐위, 공화국 수립. 나폴레옹의 조카를 공화국 대표로 선출

1852 나폴레옹 3세 황제 즉위

1870 보불전쟁 패배로 나폴레옹 3세 폐위, 제정 페지, 공화국 수립

 

 

이 연대표를 처음 봤을 때, 전 다트를 던져서 결정해도 이보다는 일관성 있을 것 같다는 감상을 받았더랬습니다. 봉기를 일으켜놓고는 무턱대고 과거의 방식을 도입하는 것으로 끝맺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까요. 게다가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온고지신 같은 것도 아니고, 과거의 폐단을 재도입하면 새롭게 생겨난 현재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식으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역사에 남을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건만 저 정도고, 그 사이에 작은 봉기 사건은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1832년 6월 파리에서 일어난, 일명 6월 봉기도 그 중 하나였지요.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전제왕정은 폐지되었지만, 프랑스는 왕을 폐위하고는 왕의 친척을 새 왕으로 세우는 길을 택합니다. 이 때 왕이 된 사람이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입니다. 루이 필리프는 왕족이었지만 전제왕권에 반대하고 민중에 우호적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지요. 공화국을 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결국 입헌군주제로 결론이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가 왕이 된 후에도, 막상 1830년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입헌군주제와 투표제도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투표권은 부유층에게만 허용되었으며, 그 외에도 서민층에게는 허울만 좋은 공수표만 나왔습니다.

 

샤를 필리퐁이 1831년에 그린 풍자판화입니다. 제목은 <7월의 비누거품>으로, 루이 필리프 국왕이 7월 혁명의 약속을 비누거품처럼 만들어버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루이 필리프 국왕에 대해 실망했고, 이 실망을 불만이 되어갔고, 불만이 쌓이면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입니다. 1832년 6월 파리 봉기도 그런 사건 중의 하나였습니다.

 

1832년 프랑스의 장군이던 라마르크가 사망했습니다. 라마르크는 공화주의에 우호적이었으며, 하층민에게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라마르크의 장례식의 규모를 축소시키기를 원했고, 이 일을 계기로 라마르크를 존경하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이것은 봉기로 확대되게 됩니다. 1832년 6월 5일, 훗날 역사에서 '6월 봉기'라 기록될 사건의 시작입니다.

 

6월 봉기는 하루만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진압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했고, 훗날 영향을 주지도 못했습니다. 시민 봉기가 끊이지 않았고, 전국적인 봉기가 여러 번 일어났던 19세기 프랑스 역사에서는 좀 요란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사건이 되었지요.

 

하지만 오늘날 1832년의 6월 파리 봉기는, 7월 혁명이나 2월 혁명보다도 훨씬 더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 <레미제라블>과, 그 소설을 각색한 뮤지컬과 영화가 유명해진 덕입니다.

 

 

2012년의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서도, 6월 봉기 장면이 극적이고 처절하게 묘사되었지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원작처럼 뮤지컬 영화도 장발장이 죽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뮤지컬 영화에서는 장발장이 문 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6월 봉기 때 죽어간 인물들이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장면이 나오면서 '죽음의 세계'리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미 죽은 인물들이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그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며,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하는 모습은 그 감동을 더합니다. 제작진은 인터뷰에서 수천 수만명이 바리케이드 주변에 모여서 프랑스 깃발을 흔드는 이 장면이, 훗날 1848년의 2월 봉기를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2월 봉기는 결국 성공했고, 프랑스에서는 왕정이 최종 폐지되게 되지요.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이며, 프랑스 소설을 통틀어 못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만큼 유명한 작품입니다.

 

어린이용 동화책을 비롯해 축약본은 대부분 장발장의 인생 이야기만 나오지만, 원작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주연 중 비중이 가장 많은 사람 정도의 위치입니다. 완역본은 2천 페이지 가량 되는데, 100페이지가 될 때까지 장발장은 등장하지도 않지요. 초반부에는 장발장이 유일한 주인공 급의 비중으로 등장하지만, 코제트가 성장한 뒤에는 장발장의 주변인물의 비중이 대폭 높아지면서 장발장의 비중도 낮아집니다. 축약본만 보고 <레미제라블>을 장발장 이야기라고만 알던 사람들이, 완역본을 보고 당황했다는 경험담이 종종 들려오지요.

 

한국에서 <레미제라블> 후반부가 오랫동안 대폭 축약되어 출판되었던 것은, 후반부가 시민혁명 내지는 봉기 이야기였던 측면도 큽니다. 마리우스가 이 봉기에 뛰어들었다가 많은 친구를 잃었고, 에포닌이 마리우스를 구한답시고 사실상 대신 죽고, 마리우스가 큰 부상을 입고 기절하자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들쳐업고 하수도로 몰래 이동하는 이야기 등이 나오는 대목이지요. 이 봉기 이야기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아예 삭제되거나, 어디서 무슨 소동이 벌어지는데 등장인물들이 어쩌다 휘말렸다는 수준으로만 언급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버젓이 출판할 수 있는 시대, 그리고 읽을 수 있게 된 시대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요. 근래 뮤지컬과 뮤지컬 영화가 흥행한 덕분에, <레미제라블> 후반부에 민중 봉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이제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요.

 

 

<레미제라블> 후반부의 배경이 된 것은 1832년 6월의 파리 봉기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덕분에, 실제 역사에서는 좀 요란한 해프닝 정도로 기록되었을 1832 6월 봉기는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보다도 훨씬 유명해졌습니다. 동시에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지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보다, 드라마로 엮어내는 것이 훨씬 더 인상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동시에,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은 작은 사건이라 해도,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계기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