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시작, 5월 2일 봉기와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아리에시아 2014. 11. 1. 11:49

역사적으로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건을 다룬 작품이, 역사적 사건 자체보다 훨씬 유명해진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레미제라블>이 프랑스 파리의 1832년 봉기를 다루지 않았다면, 오늘날 1832년 6월 5일 파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예술작품이 유명해지면서, 원래라면 별 족적 없이 잊혔을 작은 사건이 끊임없이 기억되고 회자되는 사례는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사건을 다룬 예술작품이, 그 중요한 역사적 사건보다도 훨씬 더 유명해진 경우도 있지요. 프란시스코 고야가 1814년에 그린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승전을 거듭하여 점령지를 계속 넓히던 시절, 에스파냐는 국왕과 왕세자가 극렬히 대립하고 있었고, 민생은 엉망진창인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처지의 에스파냐를 침공하여 점령한 뒤, 국왕과 왕세자 일가를 축출합니다. 국민은 처음에는 나폴레옹 군대를 기존 정부의 억압에서 해방시킬 응원군같은 존재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민중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에스파냐 국왕 자리가 비자마자, 형 조제프를 에스파냐의 새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후 프랑스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에스파냐 국왕 호세 1세'가 됩니다.

 

에스파냐 민중들은 나폴레옹에 맞서 그야말로 격렬히 맞서 싸웁니다. 후일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라 불리게 될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게릴라'라는 말이 처음 나왔습니다. 정규 군인이 아닌, 시민들이 모여 만든 민병대가 군인과 맞서 싸웠고, 지형 등을 적절히 활용해 정규군을 고전시켰습니다. 나폴레옹 시기 프랑스 출신 군인이 가장 많이 전사한 전장이 바로 이베리아였고, 나폴레옹군의 여러 장군이 전사했으나, 그토록 많은 목숨을 바쳤으면서 나폴레옹 프랑스는 승기조차 잡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이 패배는 실패였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위인전 등에서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계기로 러시아 원정 실패, 워털루 전쟁 패배만을 꼽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역사학계에서는 이베리아 반도 전쟁-러시아 원정-워털루 전쟁 이 세 가지를 나폴레옹의 실패 원인으로 여기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는 워털루 전쟁처럼 굵직한 대형 전투는 없었습니다. 산발적인 게릴라전과 저항이 끊임없이 방방곡곡에서 계속되었지요.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꼽히는 것이, 1808년 5월 2일에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민중 봉기였습니다. 에스파냐어로 5월 2일을 뜻하는 '도스 데 마요 봉기'라고도 불립니다.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 국왕과 왕세자에게 에스파냐 국왕 자리를 프랑스에게 양도하는 대신 풍족한 연금과 영지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에스파냐 국왕와 왕세자 부자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얼마 후 왕세자의 동생들도 비슷한 조건으로 프랑스로 이주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집니다. 당시 에스파냐인들은 프랑스군의 점령에 대해 슬슬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에 항의하여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곳곳에서 대대적인 민중 봉기가 일어납니다. 프랑스군은 에스파냐 민중을 가혹하게 진압했고, 에스파냐 민중들은 나름대로 저항도 해 보았지만 중과부적으로 진압되고 맙니다.

 

 

5월 2일 봉기의 기념상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1808년 5월 3일, 프랑스군은 시위에 참여했다고 판단한 에스파냐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합니다. 이 중에는 봉기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뿐만 아니라, 봉기가 진압된 뒤 시민들을 검문한 뒤 자의적으로 위험인물로 분류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봉기 다음날인 5월 3일 학살된 사람만 수백명에 이릅니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그림입니다. 무자비한 군대가 저항하던 민중을 사살하는 이미지를, 너무나도 뚜렷하고 강렬하게 그려냈지요. 무력함, 공포, 그리고 예정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처지를 이렇게 처절하게 그려낸 그림이 또 있을까요? 고야는 이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직접 겪었던 사람으로, 이 그림도 바로 1808년의 그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위 그림과 짝을 이루는 <5월 2일> 그림입니다. 기껏해야 민병대, 실제로는 민간인이었던 에스파냐 민중들이 프랑스의 정규군에 맞서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 그림에서 '적군'으로 등장하는 세력이 흑인인지라 프랑스군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프랑스군의 맘루크 기병들을 묘사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에서는 분투하면서 말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는 등 나름대로 맞서고 있으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요. 바로 다음 날에 찾아온 결말이 <1808년 5월 3일>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저렇게 무자비하게 진압해도 에스파냐 민중의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5월 2일의 봉기가 시발점이 되어,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이어지지요. 이 작품은 훗날의 사라고사에서 벌어진 전투를 그린 그림인데, 변변한 무장도 없는 사람들이 맞서 싸우고 있으며, 여자까지 제일선에 있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 여성은 '사라고사의 아우구스티나'라는 실존인물로, 약혼자와 함께 싸우다가 약혼자가 쓰러지자 자신이 대신 대포를 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훗날 그 전공을 인정받아 정식 장교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은 사라고사의 아우구스티나의 사례처럼, 여자를 비롯한 민간인들이 산발적으로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알려진 이미지에 비하면 실제로 여성이 저항을 주도한 사례는 훨씬 적다는 견해도 많지만, 사라고사의 아우구스티나처럼 전투에 직접 나선 여성은 분명히 실존했으며, 여자까지 참여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인식될 만큼 민간인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여성까지 참여한 게릴라전'이라는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이미지가 과장일지언정 거짓은 아니었다는 사례 중의 하나를 다룬 그림입니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시작이자, <1808년 5월 3일>의 전날이기도 한 5월 2일 봉기에서도 이미 한 10대 소녀가 가담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의 이름은 말라사냐로서, 봉기 다음날 5월 3일의 일제 처형 때 처형됩니다. 오늘날 말라사냐의 이름은 5월 2일 봉기를 기념하는 기념지의 '마누엘라 말라사냐 거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808년 5월 2일의 봉기와, 그 다음날의 집단처형은 국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베리아 곳곳에서 민중들이 극심하게 저항했고,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폴레옹군은 큰 전투에서는 승전을 거듭했지만, 게릴라전에는 끝내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한 곳에서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싶으면, 곧바로 다른 곳에서 교전과 저항 소식이 들려오곤 했으니까요. 이베리아 반도는 나폴레옹에게 늪과 같은 전장을 선사했고, 나폴레옹은 끝내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괴멸적 타격을 입은 뒤였고, 그 여파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지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너무나도 강렬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작게는 군대가, 크게는 위압적인 무력집단이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는 이미지의 전범이 되었습니다. 5월 2일 봉기보다도, 그 다음날 시민들을 대거 학살했다는 이미지가 훨씬 더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을 정도지요. 아마 에스파냐 밖에서는 5월 2일 봉기 자체를 고야 작품의 배경지식으로서 접하게 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봐도 강렬하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되고,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알면 숙연해질수밖에 없는 명화지요. 비슷한 주제를 다룰 때 이 구도를 차용한 명화도 여럿 그려졌습니다.

 

<1808년 5월 3일>의 구도를 차용한 다른 명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 인상파의 시초인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입니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원래 오스트리아 제국의 두번째 황자였습니다. 뮤지컬 <엘리자벳>으로 유명해진, 엘리자베트 황후의 남편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큰동생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군사점령했고, 외국 왕족을 데려와 허수아비 황제로 앉힐 계획을 세웁니다.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큰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은 신생국의 황제 제의를 받자 수락했고,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가 됩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나름대로 진정성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개인에게는 공교롭게도, 그리고 대국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하게도, 멕시코 민중들은 막시밀리안 1세를 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전황이 불리해진다 싶으니 곧바로 발을 빼버렸고, 막시밀리안 1세는 무방비로 남겨진 상태가 되어버렸으며, 멕시코 민병대는 막시밀리안 1세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멕시코 민병대는 막시밀리안 1세를 처형합니다. 마네는 바로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막시밀리안 황제를 처형한 것은 멕시코 의용군이었습니다만, 마네는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들이 처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여기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프랑스 화가였던 마네가 알고 있는 군복이 프랑스 군복밖에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 첫 번째 해석이고, 사실상 프랑스가 막시밀리안 황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방치했다는 것을 은유한다는 것이 두 번째 해석입니다.

 

 

피카소도 <1808년 5월 3일>의 구도를 차용해 민중 학살을 묘사한 작품을 그린 적 있습니다. 6.25전쟁 때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소재로 그린 작품입니다.

 

6.25 전쟁 동안에는 별의별 구실을 덧붙여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피카소는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무자비한 군대, 무력하게 학살당하기 직전의 민간인, 그리고 민중 학살을요.

 

이 그림은 오랫동안 <게르니카>처럼 군대의 민중 학살을 그린 그림으로만 알려졌다가, 한참 후 6.25 전쟁 동안 신천군에서 수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신천군 학살은 수만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는 것만 확실할 뿐, 대체 누가 무슨 명분으로 죽였는지조차 불확실합니다. 남아 있는 자료도 없고, 그 시절에는 피아 구분 없이 평소에 쌓였던 개인적 감정이나 친분 때문에 적당한 구실을 붙여 사람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니까요. <1808년 5월 3일>의 민중학살은 백 번 양보해 군대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선택지라도 있었지만, 저 때에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1808년 5월 3일>의 시대로부터 백수십 년이 지났건만, 조금이라도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암담해진 것이지요.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다음 세대에게는 우리보다는 나아진 세상을 물려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하자고 말한다면, 그 노력이 묻히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을까요? 다시는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정말 기쁜 일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