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문학사에서 여러 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아이가 주인공인 최초의 작품이자, 빈민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묘사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지요.
<올리버 트위스트>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기관인 구빈원에서, 허약한 한 임산부가 아이를 낳자마자 죽습니다. 구빈원에서는 태어난 아이에게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구빈원에서 키웁니다. 구빈원의 환경은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열악했고, 성장기의 아이에게 묽디묽은 죽 한 그릇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올리버는 어느 날 죽 한 그릇을 먹고 난 뒤 조금만 더 달라는 말을 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구빈원에서 쫓겨나다시피 합니다. 올리버는 런던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품고 무작정 런던으로 향합니다. 런던에서 웬 자기 또래 소년이 자기에게 잘 대해주길래 별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소년들에게 소매치기를 시키는 범죄단에 끌려들어가게 되지요. 그걸 알아차린 올리버는 소스라쳐 달아나버리고, 그게 계기가 되어 웬 신사분이 올리버를 도와주게 됩니다. 범죄단에서는 자기들을 알고 있는 올리버를 다시 범죄단에 끌어오기 위해 갖가지 술책을 부리고, 올리버를 납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올리버는 범죄단에서 도망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했고, 범죄단이 자기들 도망치겠다고 올리버를 내버려두고 달아났을 때에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을 맞기는 하지만, 그 동안 올리버는 지독한 환경에서 몸고생 마음고생을 많이도 했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를 심도 있게 묘사합니다. 구빈원의 묘사, 빈민가의 묘사, 보잘것없는 적선을 던져주거나 본인이 엄청난 적선을 한다고 생각하며 빈민들을 멸시하는 '독지가'의 모습 등이 세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지요.
<올리버 트위스트> 초반부에서는 구빈원이 어떤 곳인지, 수용한 '빈민'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묽은 죽 한 그릇이 식사의 전부고, 아주 가끔 빵 조각을 주는 것을 대단한 자선으로 생각하고, 환경이 불결한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지출되는 비용을 줄이겠답시고 작정하고 부실한 식사를 내주고, 아이들이 죽어가니까 관 값이 지출되는 건 아깝지만 식사비가 줄어들어서 다행이라는 식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별다른 교육도 시켜주지 않지요. 올리버는 구빈원에서 밧줄의 실밥을 푸는 법을 익히라는 말을 듣는데, 막상 그건 실생활에서는 아무 효용도 없는 지루한 반복작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고서는 먹여 주고 재워 주니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지요. 굶주리다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환경이 열악한 건 둘째치고, 스스로 뭘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서요!
구빈원에서는 건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묽은 죽만 주었다는 이야기는, 작품 초반에 여러 번 언급됩니다. 이 죽이 얼마나 묽었는지, 올리버는 후일 브라운로 씨의 집에서 진한 고기 수프를 대접받을 때, "이 수프를 구빈원 규정에 맞게 묽게 탄다면, 350명분의 죽을 만들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이 묽은 죽조차 1인당 한 그릇이 전부였습니다. 아이들이 죽어나갈 만도 하지요. 굶주린 구빈원 아이들은 제비를 뽑아 죽을 조금만 더 달라는 말을 할 사람을 뽑습니다. 올리버가 제비에서 뽑혔고, 죽 한 그릇을 다 먹은 뒤 "죽 한 그릇만 더 주세요(원문을 직역하면 "조금만 더 주세요."에 더 가깝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구빈원의 높으신 분들은 말 그대로 뒤집어지고, 올리버를 다시 없을 뻔뻔하고 몰염치한 불한당처럼 매도합니다. 그리고 올리버는 구빈원에서 지낼 자격조차 박탈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지요.
"죽 한 그릇만 더 주세요." 장면을 그린 1838년의 삽화로, 작가는 아이작 크룩생크입니다. 그 한 마디로 모두들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지, 보는 입장에서 소스라치는 감정이 전해질 정도입니다. 비쩍 마른 아이들이 죄수복을 방불케 하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보이시나요? 그런데 삽화의 묘사도 실제에 비하면 그나마 미화된 편에 속합니다. 적어도 옷에 구멍은 안 뚫려 있고, 발 크기에 맞는 신발을 신고는 있으니까요.
"구빈원"은 근대 영국에 실제로 존재했던 장소입니다. 구빈법에 의거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만든 것이지요.
구빈법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는 "사랑을 위해 종교를 바꿨다"라는 이야기로 유명한데, 구빈법의 단초를 제공한 위인이기도 합니다. 헨리 8세는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이 딸 한 명만 있는데 폐경기를 맞자,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핑계로 새 왕비를 맞을 결심을 합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국교는 카톨릭이었는데, 헨리 8세는 돌연 국교를 카톨릭에서 헨리 8세가 창시한 영국 국교회로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카톨릭을 전격 탄압하며 카톨릭 수도원의 자산을 몰수합니다. 신심이 깊은 사람들은 수도원에 땅을 기부하거나 귀한 보물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들은 수도원의 자산으로 대대로 물려내려왔습니다. 헨리 8세는 이걸 모두 압수하여 국왕 개인의 재산으로 삼았습니다. 막상 영국 국교회와 카톨릭의 차이점이란, 카톨릭은 교황이 지도자이고, 영국 국교회는 영국 국왕이라는 점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리에는 별반 차이도 없었는데도요.
카톨릭 수도원에서는 귀족 출신 성직자가 대놓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등의 폐해도 많았지만, 종교 본연의 임무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선뜻 숙소를 제공해주었고, 기본적인 의료처치도 해 주었지요. 하지만 수도원이 공중분해되자, 수도원의 도움을 받던 사람들은 졸지에 의지할 데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고스란히 거리를 떠도는 빈민이 되어버렸고요.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영국의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엘리자베스 1세가 구빈법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구빈원은 구빈법의 연장선에서 생겨나게 된 시설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구빈법은 가난을 개인의 죄악쯤으로 취급했습니다. 요컨대 본인이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워 그런 처지가 되었으나, 나라가 자애롭게 의식주를 제공하니 고맙게 받기나 하라는 식이었지요. 하지만 구빈법의 실질적 혜택은 형편없었고, 구빈원의 시설은 수용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당장 굶지는 않겠지만, 서서히 죽어갈 수도 있는 장소였지요. 게다가 지배층에서는 이런 열악한 시설에 사람들을 수용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은연중에 권장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말인즉슨 구빈원의 시설이 좋으면 빈민들이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구빈원에서 안주할 생각만 할 테니, 일부러 시설을 열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쪽으로는 별다른 효과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기력도 없게 만들어놓고, 뭘 어쩌라는 것인가요. 병원은 고사하고 의사도 없고, 학교 비슷한 시설도 전무하고, 누가 구빈원 아이를 도제나 심부름꾼으로 원하면 내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는 구빈원 관리자에게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의 돈이 구빈원 예산으로 주어지지만, 그것을 거의 모두 관리자가 횡령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구빈원에게 예산을 내주는 높으신 분들이나 예산 금액만 보는 사람들은, 구빈원 아이들이 힘들다는 말이라도 하면, 그 많은 돈을 배정받고서도 만족할 줄 모르다니 뻔뻔하다는 말이나 했겠지요. 게다가 구빈원을 감사할 때에는 언제 누가 가는지 미리 통보하고 갑니다. 당연히 구빈원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아이들을 멀끔하게 단장시키고, 그날만큼은 좋은 음식을 내주며, 감사결과에는 이상없다는 기록만이 적히는 모습도 묘사되지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현실을 날조하거나 과장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에서는 구빈원 아이들이 체구가 작고 비쩍 말라 굴뚝 청소에 유리한 체격이라고 대놓고 말하는가 하면, 배불리 먹은 적이 없이 적게 먹는 습관이 들었으니 고용하면 식비가 덜 들 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저 정도면 실제 현실에 비해 점잖게 표현해준 정도에 듭니다.
구빈원의 의료 및 기본적인 복지를 나라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법률이 생긴 것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발표되고도 30년 가까이 지난 1867년에 이르러셔였습니다. 그나마도 크림 전쟁의 백의의 천사로 사회적 명사가 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구빈원 의료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덕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나이팅게일같은 사회적 명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구빈법을 만든 뒤 300년 남짓 지나서야, 비로소 구빈원에서 기본적인 의식주만큼은 보장을 해 주고, 구빈원에서 학대받다 죽을 걱정만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올리버 트위스트같은 아이가 얼마나 많았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확한 기록조차 없으니까요.
<올리버 트위스트>가 아니었다면, '구빈원'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사람들은 거의 완벽하게 잊어버렸을 겁니다. 막연하게 그런 열악한 곳이 있었더라는 정도가 고작이었겠지요. 산업혁명 시대 아동노동이 얼마나 열악했는지가,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탄광에서 일하는 막연한 이미지 정도로만 남은 것처럼요. 아동노동 관련법률이 생긴 것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수십 년이 흐른 뒤였고, 그나마 법률의 내용에 9살 미만에게는 하루의 절반 이상 노동을 시키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있는가 하면, 저것마저도 사업가들이 극렬히 반대했다는 걸 보면,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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