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니제티의 <연대의 딸>은 프랑스 코미크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손꼽힙니다.
<연대의 딸>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무대가 되는 연대에서 옛날 어느 날 한 여자아이가 버려진 것을 발견하고 마리라는 이름을 붙여 연대에서 키웠고, 마리는 연대의 마스코트가 되어 자라납니다. 그리고 마리는 연대 근처의 청년인 토니오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토니오는 그저 마리와 함께 있다고 싶은 일념으로 군대에 자원하지요. 이 때 부르는 노래가 테너 고음 아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친구여, 오늘은 기쁜 날 Ah! Mes Amis"입니다. 상황을 놓고 보면 남주인공이 군인이 되어 기쁘다는 이야기가 되기는 하는데, 가사만 놓고 보면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이 있는 곳에 들어오게 되어, 여주인공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어 기뻐하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토니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마리의 이모라는 사람이 나타나, 마리가 원래 귀족이며 뒤늦게 아이를 찾았으니 데려가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토니오와 마리는 헤어집니다. 하지만 마리는 귀족 생활과 교습에는 적응할 수 없었고, 노래 교습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군가를 부르고 있는 등 연대의 딸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지요. 그 때 토니오가 나타나 마리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마리의 이모라며 나타났던 부인은 사실 마리는 자신의 딸이며, 딸이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한다며 토니오와의 사이를 허락합니다.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가 "친구여, 오늘은 기쁜 날"을 부릅니다. 막판에 하이 C 고음이 아홉 번이나 나오는 난곡이지요. 영상을 보면, 아리아가 끝나고 2분 가까이 박수소리가 나옵니다. 파바로티가 이 노래를 완벽히 소화했을 때, 제대로 부르는 테너가 120년만에 나왔다는 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반 세기도 되지 않아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가 등장해 다시 이 노래를 완벽히 소화했으며, 현역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고음을 겨우 맞추는 사람까지 치면 아마 손가락으로 셀 정도는 되겠지만요.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못해 명맥이 끊겨서, 부르기 어려운 노래로서의 유명세조차 없을 정도의 곡입니다.
"친구여, 오늘은 기쁜 날"의 프랑스어- 한국어 대역 대본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오페라 코미크에 걸맞게 흥겨운 음악도 많고, 약간 갈등이 생기는가 싶다가 곧바로 해피엔딩이 되는 작품이지요. 이탈리아 작곡가가 작곡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의 대표작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한때는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기념일 때마다 <연대의 딸>을 공연하는 것이, 거의 전통으로 자리잡기도 했다고 합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그린 기록화입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적 대사건이며,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귀족들을 수감하는 감옥으로서, 전제정치의 상징처럼 여겨진 곳이었습니다. 그 기세등등한 귀족들을 가두는 감옥이라는 점이 공포심을 불러일으진 거지요. 그 바스티유 감옥을 시민군이 점령해 습격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막상 바스티유 감옥은 수감자가 책을 가지고 오면 감옥 예산으로 책장을 만들어줄 정도로 시설도 좋고, 해가 지기 전에만 돌아오면 별도의 허가 없이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정도로 널널한 곳이었지만요. 감옥에 갇혔어도 귀족은 귀족이었던 겁니다. 프랑스 대혁명 목전에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은, 수감자를 해방하겠다는 대의명분 같은 것이 아니라, 감옥에 있던 무기와 화약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바스티유 감옥 습격은 프랑스 대혁명의 첫걸음으로서 더없이 미화되었습니다. 바스티유 총책임자는 시민들을 해칠 수는 없다면서 곧바로 성문을 열었지만 이내 학살당한 것도 철저하게 은폐되고, 시민군이 맹렬한 전투 끝에 바스티유를 점령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집니다. 그리고 7월 14일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념일로 자리잡았지요. 바스티유 미화가 너무 심해서 그렇지, 프랑스 대혁명의 단초가 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바스티유 기념일에, <연대의 딸>은 고정 레퍼토리가 된 거지요. 작품을 보면 군대 쪽 기념일에 걸맞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남주인공은 여주인공과 함께 있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군대에 기쁘게 자원하고, 여주인공은 군 부대에서 군인들의 귀여움을 받고 군인들을 돕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군가를 쾌활하게 부르지요. 세계 1차, 2차 대전 중에 <연대의 딸>의 인기가 유난히 높았던 것도, 너무나도 잘 이해됩니다. 특히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대전 중에서는 미국에서도 이 오페라의 인기가 엄청나게 높아져서, 많이 공연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명 인기 소프라노가 <연대의 딸> 공연 분장을 하고 군인들을 위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0-1940년대 미국 최고 인기 소프라노인 릴리 퐁스는 <연대의 딸>을 많이 공연했으며, 여주인공 마리 역의 옷차림으로 군인 위문 행사에 나가기도 했지요. 릴리 퐁스가 마리 역으로 분장한 사진으로, 음반 표지입니다. 프랑스 밖에서도 <연대의 딸>을 '애국적이고 군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받아들였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막상 작곡가는 딱히 군대와 군인을 미화한다기보다는 그냥 적당한 배경설정으로 써 먹은 기색이 짙지요. 이탈리아인 작곡가가 남의 나라인 프랑스 군대에 그리 애틋한 감정을 가질 일도 애초에 없을 테고요. "친구여, 오늘은 기쁜 날"의 가사를 봐도 그렇고, 다른 아리아나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봐도 그렇지요. 하지만 어찌 되었건 군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며, 남주인공이 군인이 된 것을 기뻐하는 아리아까지 있으니, "애국심"이라는 테마에는 너무나도 잘 들어맞았습니다. 작품을 왜곡하거나 악용한 건 아니니, 그냥 그렇다더라- 정도로 끝낼 이야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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