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밖의 역사

모차르트의 징슈필과 요제프 2세의 국민극장 정책

아리에시아 2014. 7. 19. 11:58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인이었고, 모국어는 독일어였지만, 대부분의 오페라는 모국어인 독일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작곡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는 모두 이탈리아어 작품이고, 다른 오페라나 성악곡 중에서도 이탈리아어가 압도적으로 많지요. 모차르트의 전성기 오페라 중 독일어로 작곡된 작품은 <마술피리>, <후궁 탈출>뿐이며, 십대 시절 발표한 작품까지 계산해도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나마 독일어 작품도 엄밀히 말하면 오페라가 아니라, 징슈필 평식으로 작곡된 것이고요.

 

모차르트는 왜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작곡했을까요? 이탈리아인이 주문한 작품이었을까요? 아니면 이탈리아에서 공연한 작품이었을까요? 아니요,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작품 대부분은 자신이 활동하던 독일어권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던 사람들을 위해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음악문화를 살펴보면, '독일어권에서 태어난 모차르트가 왜 이탈리아어로 오페라를 작곡했는가?'가 아니라, '18세기에 활동하던 모차르트가 왜 이탈리아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오페라를 작곡했는가?'라는 의문이 더 떠오르게 됩니다.

 

 

모차르트가 한참 활동하던 당시, 오스트리아를 다스린 것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였습니다. 요제프 2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의 최전성기를 이끈 여걸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이었습니다. 요제프 2세는 좋게 말하면 이상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몽상적인 성격으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적인 개혁을 너무 성급하게 추진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관점에 따라 과감한 개혁시도로 볼 수도 있고, 비현실적인 고집으로도 볼 수 있었을 것인데, 확실한 것은 대부분 별 효과 없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시대를 앞서나갔고 나쁘게 말하면 당시 현실과 괴리된 정책인지라,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니까요.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 중에는 자국어 오페라를 중흥시키는 것도 있었습니다. 당시 상류층에서는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공연하는 것이 당연하고 타당하게 여겨졌으며, 새로 만들어지는 오페라도 모두 이탈리아어로 작곡했습니다. 서민 계층이 오페라를 거의 즐기지 못했던 데에는, 외국어로 공연되어 내용을 알아듣기 힘들다는 이유도 컸지요. 이에 요제프 2세는 독일어로 작곡되어 독일어만 쓰는 민중들도 즐길 수 있는 오페라를 만들고자 했고, 독일어 오페라 작곡을 적극 후원합니다. 그리고 여러 독일어 오페라가 작곡되어 부르크테아터, 일명 궁정국민극장에서 올려지게 되지요.

 

갓 빈에 상경한 모차르트는 황제의 독일어 오페라 중흥정책에 부응해, <후궁 탈출>을 작곡해 발표합니다. 그리고 <후궁 탈출>은 부르크테아터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다른 여러 극장에서도 공연되는 인기작이 되지요. 이후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마술 피리> 등의 걸작 오페라를 연이어 발표합니다.

 

모차르트 시대 부르크테아터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현재의 부르크테아터의 모습입니다. 모차르트 이후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대폭 증축되었습니다. 여담으로 현재의 부르크테아터 건물에는 1880년경 미술활동 초창기 시절의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키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화> 등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아르누보 미술의 대표 화가로, 미술활동 초창기에는 극도로 고전적인 화풍을 구사했는데, 부르크테아터의 벽화는 그 시절 클림트의 작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부르크테아터 벽화로 그린 <글로브 극장, 셰익스피어 연극>입니다. 셰익스피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마지막 장면입니다. 연극 공연 및 청중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다른 인물들이 16세기 르네상스 즈음의 복식을 착용한 데 비해, 오른쪽 구석에 흰 셔츠 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눈에 띄는데, 이 남자 그림은 당시 클림트의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궁정국민극장'이라는, 다소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부르크테아터의 호칭에서부터 요제프 2세의 개혁정책이 드러납니다. 부르크테아터는 직역하면 궁정 극장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원래 궁정에서 발레를 공연하는 극장이었습니다. 요제프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발레극장을 오페라와 연극을 공연할 수 있도록 대폭 개축하고, 로열석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좌석은 일반인에게 개방합니다. 왕실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도 입장료를 내면, 얼마든지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요제프 2세가 자국민도 즐길 수 있도록 자국어로 오페라를 공연하는 국민극장 정책을 시도하면서, 부르크테아터에 '궁정국민극장'이라는 호칭을 하사합니다. 이후 궁정극장이라는 뜻을 지닌 부르크테아터는 그 이름과 달리 대중적이고 민중 계층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많이 공연하게 되지요. 특히 독일어로 작곡된 징슈필을 다수 의뢰해,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을 비롯해 많은 징슈필이 공연되었습니다.

 

 

징슈필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의 오페라 내지 노래를 끼워넣은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페라에서는 원래 등장인물끼리 대화할 때에도 오케스트라 반주가 곁들여집니다. 이런 대목을 일러 레치타티보라고 하지요. 하지만 징슈필에서는 대화는 말 그대로 대화이고, 단속적으로 노래가 여러 편 들어갑니다.

 

<후궁 탈출>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모차르트의 본격적인 출세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징슈필 걸작을 남긴 거의 첫번째 작곡가였습니다. 하지만 요제프 2세의 국민극장 정책은 몇 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후궁 탈출>이라는 인기작을 낳기는 했지만, 문화후원정책 자체의 성공이라기보다는, 모차르트 개인의 재능 덕을 본 것에 훨씬 가까웠지요. 그것이 사실상 마지막이었습니다.

 

모차르트보다 백여년이 지나, <로엔그린>의 '결혼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리하르트 바그너가 등장합니다. 바그너는 독일어 오페라를 다수 작곡했고,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어로 오페라를 작곡하는 작곡가가 여럿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모차르트 이후 바그너가 등장하기까지 그 백여년 동안, 아직껏 회자되는 독일어 오페라는 베토벤의 <피델리오>, 베버의 <마탄의 사수> 정도가 고작입니다. 이 두 작품은 일단 징슈필로 분류되기는 합니다만, 징슈필 계보에 오르는 독일어 오페라 작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은 그때까지의 오페라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식이었고, 징슈필과도 딴판이었으니까요. 적어도 부유한 귀족 나리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춘 작품을 후원하는 상류 사교계에서, 징슈필을 비롯해 독일어로 된 오페라를 작곡하는 경우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모차르트도 <후궁 탈출> 이후에는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탈리아어로만 작곡했습니다. 그 중에서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등은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후궁 탈출>이 성공한 지 몇 년만에, 자국어 오페라 및 국민극장 정책의 중심지였던 부르크테아터에서조차 자국어로 공연되는 오페라인 징슈필은 자취를 감추었던 것입니다.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에 기반한 문화중흥정책이, 뼈대 없이 막연한 목표만으로 위에서 밀어붙이는 식으로만 진행되면, 어떤 결과를 맞는지 보여주겠다는 것처럼요.

 

 

하지만 민중 계층에서는 오페라 형식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자국어 징슈필이 조금씩 퍼져나갔습니다. 인기 있는 작곡가는 대부분 상류 사교계 쪽과 직결되는 이탈리아어 오페라 쪽으로 빠졌는지라 음악적 완성도는 훨씬 낮다고 해도, 징슈필을 원하는 관객도 그 관객에 맞추어 징슈필을 작곡하는 작곡가도 꾸준히 있었습니다.

 

1791년, 새로운 징슈필 작품을 찾던 극작가 쉬카네더는 친분이 있던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징슈필을 의뢰합니다. 모차르트는 그 의뢰를 받아들였고, 이 새로운 징슈필은 하늘을 찌를 듯한 큰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밤의 여왕 아리아'가 나오는 <마술피리>입니다.

 

디아나 담라우가 2002년 코벤트가든 공연에서 부른 '지옥의 복수심이 끓어오른다' 아리아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같은 노래에서 한국어 자막이 있는 유뷰트 영상입니다. 일본어 자막과 한국어 자막이 있으며, 한국어 자막은 일본어 자막을 중역한 듯합니다. 이모티콘 등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가사 내용을 충실하게 옮겼습니다.


밤의 여왕은 두 곡의 아리아를 부르는데, 이 중 이 두 번째 아리아가 정말 유명합니다. 조수미 등 맑고 아리따운 고음으로 유명한 소프라노들이 이 아리아를많이 불러서 오해하기 쉬운데, 밤의 여왕 아리아는 가사만 놓고 보면 여왕이 딸에게 '내 원수를 네가 죽이지 않는다면, 널 딸로 여기지 않겠다!'라고 윽박지르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저런 고음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소프라노의 대부분은 나긋나긋한 노래를 잘 부르는 유형에 속하는지라, 악보대로 노래를 제대로 부르면서 무시무시한 가사의 분위기까지 동시에 살려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담라우는 드물게 노래를 부르면서, 무시무시하고 위압적인 분위기까지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 가수입니다.

 

 

요제프 2세의 국민극장 정책은 당대에는 그 정책 자체는 성공하지 못했을지언정, 모차르트가 <후궁 탈출>을 작곡하게 했고, 나아가 <마술 피리>를 낳는 토양이 되어 주었습니다. 요제프 2세의 국민극장 정책이 없었다면, 모차르트가 <후궁 탈출>을 작곡하지 않았다면, 징슈필이라는 장르 자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마술 피리>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모차르트가 <후궁 탈출>로 본격적인 징슈필 경험을 쌓았을 일도, 새로운 징슈필을 원하는 관객층이 생겨났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절정을 맞이한 자국어 오페라 열풍의 첫 걸음을 기록했다는 역사적 의의도 무시할 수 없고요.

 

어떤 문화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을지언정, 그 시도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계기가 되고, 그 도전이 경험이 되어 새로운 창작을 낳는 밑거름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제프 2세의 국민극장 정책이 그 자체로는 금세 흐지부지되었을지언정,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을 위촉하고, 나아가 <마술 피리>의 작곡으로 이어지게 된 사례는, 이런 상황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