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과> 제인 그레이

아리에시아 2014. 4. 26. 11:56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이자, 왕비와 이혼하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종교까지 바꿔버린 것으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는 어떻게든 아들을 낳기 위해 결혼을 거듭했습니다. 첫째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딸 한 명만 있는데 폐경되었다고 쫓아내고, 둘째 왕비 앤 불린은 딸을 낳고 계속 유산하니 누명을 뒤집어씌워 처형하고, 셋째 왕비 제인 시모어가 마침내 아들을 낳습니다. 하지만 제인 시모어는 출산 후유증으로 훗날 에드워드 6세가 될 아들을 낳자마자 죽고 말지요.

 

그 뒤로도 헨리 8세는 결혼을 세 번 더 했습니다만 더 이상의 아이는 없었습니다, 네 번째 왕비 클레페의 안나는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혼인무효하기로 합의하고, 다섯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는 결혼 전에 애인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트집을 잡아 처형했지요. 여섯번째 왕비 캐서린 파는 아이를 더 낳기 위해서가 아니라, 태어난 아이들에게 참한 계모가 있어겠다는 이유로 결혼한 사람이었고, 캐서린 파 왕비는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헨리 8세는 결혼을 위해 종교까지 바꾼 왕, 왕비를 여섯 명이나 맞아들인 왕으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당시 잉글랜드 법에서 공주가 여왕이 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왕자는 없고 공주만 남아 여왕이 된 역사적 사례는 없었으며, 오히려 그 상황에서 남자 친척이 여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주를 축출해 즉위한 사례는 있었지요. 12세기 초 잉글랜드 왕이었던 헨리 1세의 아들은 모두 일찍 죽어 딸 마틸다 한 명만 남았는데, 헨리 1세의 조카이자 마틸다의 사촌인 스티븐이 마틸다를 밀어내고 잉글랜드 왕좌에 앉았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내전이 봉합된 뒤에도 논란은 지속되었습니다. 스티븐의 아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스티븐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고 마틸다가 여왕 즉위를 포기하는 대신, 마틸다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는 조건으로 일단 평화적인 종결은 보았지만요. 이 역사적 사례를 보면, 가뜩이나 불안정한 신생 왕조 튜더 왕가의 국왕이었던 헨리 8세가 여왕 대신 남자 국왕을 원한 것이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넷째 왕비 이후로는 그렇게 이해할 구석도 없지만요. 본인이 둘째 아들이었으니 아들 하나로는 불안하다고 여긴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손 쳐도, 외모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결혼 전에 애인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등의 이유로 저런 행보를 보이는 건 어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결혼을 여섯 번이나 하고도 헨리 8세는 아이를 세 명밖에 낳지 못했습니다. 왕자 한 명과 공주 두 명, 그것도 공주 두 명은 여자라는 것은 둘째치고 헨리 8세가 왕비를 쫓아내면서 공주 지위를 박탈한다고 천명했던 존재였지요. 첫째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딸인 메리 1세도, 둘째 왕비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도, 끝내 공식적으로 공주라는 칭호로 불리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에드워드 왕자는 몸이 너무나도약한 상황이었고요. 실제로 훗날 16살까지밖에 살지 못했지요.

 

그래서 국왕에게 엄연히 아들이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헨리 8세의 친척이 슬슬 왕위계승 후보자로 중요한 존재로 격상합니다. 헨리 8세에게는 여자 친척은 여럿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나인 마거릿 튜더와 여동생인 메리 튜더가 여러 아이를 낳았지요. 특히 메리 튜더는 잉글랜드 귀족 찰스 브랜든과 결혼해 여러 딸을 낳았고, 그 중 프랜시스라는 딸이 세 명의 딸을 낳습니다. 이 세 명의 딸의 이름은 각각 제인 그레이, 캐서린 그레이, 메리 그레이입니다.

 

프랜시스와 남편 찰스 브랜든은 제인 그레이를 5촌 숙부 되는 에드워드 6세와 결혼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인을 엄하게 키운답시고, 학대에 가깝게 혹독하게 대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제인 그레이는 10대 초반 시절, 스승에게 공부를 할 때는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어 가장 행복하다는 말을 남긴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6세가 국내 귀족이 아닌 외국 공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고, 제인 그레이가 왕비가 될 가망이 없게 되자, 제인의 부모는 제인을 구박하고 더욱 학대하게 되지요.

 

 

제인 그레이가 16세가 되던 해, 국왕 에드워드 6세가 죽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다음의 서열은 헨리 8세의 첫째 왕비가 낳은 딸이자, 헨리 8세가 공주 지위에서 폐출했다가 복위시켰던 메리 공주였습니다. 메리 공주는 헨리 8세가 바꾼 종교인 영국 국교회가 아니라 카톨릭교를 믿고 있었고, 무엇보다 어머니를 쫓아내는 데 한몫했던 헨리 8세의 신하들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헨리 8세의 신하 중 메리 공주를 여왕으로 즉위시킬 수 없다는 무리가 나왔지요. 이 사람들은 헨리 8세의 딸이 아니라, 조카의 딸인 제인 그레이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메리 공주의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메리를 제외하고, 대신 친척인 제인 그레이를 새 왕으로 옹립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스스로의 세력도 없는 어린 미성년자였던 제인에게 선택권은 없었습니다. 제인 그레이의 부모는 이 계획에 동의했고, 부모의 권위를 내세워 제인에게 자신의 결정을 따를 것을 강요합니다. 제인은 자신이 여왕으로 선택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기절했고, 자신이 아니라 메리 공주가 여왕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딸을 여왕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부모와, 다루기 쉽고 어린 여왕을 원하는 신하들은 제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여왕으로 즉위시킵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몇몇 신하들을 제외하고, 제인을 여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영국의 새 군주라고 생각한 인물은 정당한 계승자였던 메리 공주였습니다. 민중은 메리 공주를 지지했고, 메리는 제인이 즉위한 지 9일 만에 제인 그레이를 옹립한 일당을 모두 제압하고 여왕으로 즉위합니다.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의 언니이자 피의 메리, 블러디 메리로 알려진 메리 1세입니다.

 

메리 1세는 제인 그레이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학대당하다시피 자랐다는 것도, 부모와 주변 사람들이 협박하다시피 강요해서 여왕으로 즉위시켰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메리의 반대파가 제인 그레이를 왕으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키자, 군주로서 반역자를 처형하라는 압력에 시달리게 됩니다. 메리 1세는 제인 그레이를 구하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무조건 방면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지만, 제인 그레이는 개종 대신 처형을 선택합니다. 제인 그레이의 삶은 열일곱 살 때, 형리의 도끼 아래서 끝나게 됩니다. 처형될 때 제인 그레이는 드디어 이 세상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만큼은 자랐지만,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에는 너무 어렸던 비극적인 소녀. 낭만주의 시절 비극은 제인 그레이를 주목해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많은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개종을 거부하고 처형당했다는 것 때문에 성녀 대우를 받은 적도 있고요. 하지만 낭만주의 감성 세계의 밖에서, 제인 그레이는 역사에서 거의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비극적인 왕실 아가씨라는 이미지가 전부였지요. 잉글랜드 역사에서 제인 그레이는 제외해도 무방한 존재입니다. 스스로 한 것도 없고, 여왕 시절도 9일만에 끝났으니까요.

 

제인 그레이는 초상화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랜 시절 제인 그레이 초상화라고 여겨졌던 그림은 헨리 8세의 여섯째 왕비 캐서린 파의 초상이라고 결론이 났지요. 최근 발견된 다른 초상화도 '제인'이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으며, 그 초상화가 그려지던 무렵 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족 아가씨는 제인 그레이밖에 없다는 이유로 제인 그레이 초상으로 추정될 뿐,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제인 그레이의 초상화라고 언급되던 초상화로, 현재는 헨리 8세의 여섯째 왕비 캐서린 파의 초상화라고 거의 결론이 난 상황입니다.

21세기에 발견된 초상화로, 제인 그레이를 그린 초상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추정의 근거는 극히 빈약합니다. 초상화에 쓰여진 이름은 '레이디 제인'밖에 없고, 성은 쓰여있지 않습니다. 초상의 여인은 16세기 초 유행했던 옷을 입고 있는데, 이 당시 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족 아가씨는 제인 그레이밖에 없다는 것이 추정 근거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제인 그레이 초상이라는 설이 제기되었을 때부터, 국왕의 자녀 다음으로 중요한 왕족을 그린 초상화라기에는 그림 솜씨가 너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제인이라는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 명문이 심하게 마모되었기 때문에, 첫 글자가 J인지 I인지 확정할 수 없는 상태거든요. '제인 그레이'도 아니고 '제인'이라고 덜렁 쓰여 있는 것이 근거의 전부이고, 그나마 제인이 아닌 다른 이름일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니, 보다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진위논란은 계속될 듯 합니다.

 

 

비극적인 개인사가 애달프고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던 제인 그레이는 초상화조차 남아있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튜더 왕조에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났기에, 더욱 그랬지요. 왕비를 다섯 번이나 바꾼 헨리 8세, 논란의 여지 없는 공주로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폐출되어 20년 넘도록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마침내 즉위했지만 결국 폭군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메리 1세, 처형당한 왕비의 딸이자 공주 대우조차 받지 못했지만 결국 잉글랜드의 황금 시대를 연 여왕이 되었던 엘리자베스 1세, 거기에다 헨리 8세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손녀로서 조국에서는 폐위되고 망명국에서는 유폐되었다가 처형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등, 그 시대 영국에서는 제인 그레이의 비극적 삶은 해프닝 수준으로 보일 정도의 인생 이야기와 사건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습니다. 제인 그레이가 여전히 기억되는 데에는, 역사를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던 폴 들라로슈가 <제인 그레이의 처형>이라는 작품을 그린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처연한 그림은 깊은 인상을 주고, 그림의 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호기심을 같이 불러일으키지요.

 

 

제인 그레이가 처형당할 때, 눈가리개를 해서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지?"라면서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부가 제인을 처형대로 안내했지요. 바로 그 에피소드를 그린 그림입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그림 중에서 손꼽히는 명작이며, 비극적으로 이용당하다 결국 타의에 삶을 끝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더없이 처연하게 그려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