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소재로 한 예술은, 예술적으로 각색된 모습을 실제 역사로 각인시킬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서 잊힐 뻔한 역사적 사건을 인상적인 예술로 승화시켜 다시금 상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1936년, 에스파냐에서는 파시즘 독재자 프랑코가 주도한 내전이 벌어집니다. 에스파냐 내전, 혹은 스페인 내전으로도 불리는 이 내전은 약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프랑코의 승리로 끝났지요. 이후 수십 년간 에스파냐는 독재정권 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 내전은 세계 2차 대전의 전조를 보였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조지 오웰 등 당시의 지식인들이 프랑코에 대항하기 위해 의용군에 참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막상 에스파냐 내전 자체는 묘할 정도로 묻혀버렸지만요.
에스파냐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1월, 작은 마을 게르니카는 전투기의 폭격을 받게 됩니다. 프랑코를 지지하는 프랑코파 전투기가 게르니카의 하늘 위로 몰려와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군용으로 쓰일 수 있는 다리와 대형 건물을 폭격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마을 곳곳에 폭탄을 떨어뜨리면서 민간인도 수없이 죽었습니다. 전쟁에서 민간인 마을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 수많은 공분을 불러일으켰지요.
게르니카는 무구한 민간인들만 있는 마을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프랑코에 대항하는 바스크 군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프랑코파의 게르니카 폭격 작전은 다리와 대형 건물을 파괴해 바스크 군이 철수하지도, 편안히 주둔하지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게르니카에는 많은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고, 전투기에서는 민간인들이 휘말리건 말건 폭탄을 투하했고, 그 때문에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구 7천 명의 작은 마을이던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죽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몇 명의 사망자가 나왔는지조차 제대로 집계되지 않을 정도였지요.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현재로서는 약 3백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게르니카에서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는, 2차 대전과 그 이후의 온갖 전쟁범죄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좀 요란한 사건 정도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 뒤로는 민간인 수천,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사건도 여러 번 일어났으니까요. 당시에는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폭격했다는 데 대한 심리적 충격도 컸지만, 그 뒤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서, 거기에도 충격을 덜 받게 되었지요.
에스파냐 내전도 어느새 은근히 잊혀져, 아는 사람만 아는 사건이 되어버린 판국입니다. 그러니 게르니카 폭격사건은 잊혔을지도 모릅니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만, 원래 에스파냐인이었고 에스파냐인이라는 애착도 강했습니다. 피카소는 당시 에스파냐 밖에 있었고, 프랑코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있었지요. 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사건 이야기를 듣고 <게르니카>를 그립니다. 가로 길이는 8미터 가까이 되고, 높이도 3.5미터에 달하는 대작이었습니다. 피카소는 한 달이 넘는 동안 이 작품에만 매달렸고, 1937년 파리 국제박람회의 에스파냐관에서 <게르니카>가 전시됩니다. 당시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압도되어,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수년 후, 나치 게슈타포 장교가 <게르니카>를 두고 피카소에게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소?"라고 물었을 때, 피카소가 대답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피카소는 "아니오, 당신들이 그렸소."라고 대답했지요. 전쟁의 참상을 그리게 한 것은,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요.
에스파냐 내전은 프랑코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피카소는 에스파냐 땅을 밟을 수도 없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는 밟고 싶지도 않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면 이 작품을 에스퍄냐 땅에서 전시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고, 프랑코가 죽은 뒤 에스파냐로 가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에스파냐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게르니카 폭격 사건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고,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도 내전 등에서 민간인 마을이 폭격당하는 일은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전쟁범죄가 일어난 이후, 게르니카 폭격 사건은 흔한 민간인 마을 폭격사건 중 하나로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예 잊혀졌을지도 모르지요.하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게르니카 폭격사건을 절대 잊힐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이 망각되지 않는 이상, 절대 잊힐 수 없는 사건으로요.
이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전쟁에 휘말린 민간인들의 비극을 절대 잊을 수 없게 되지요. <게르니카>는 비단 게르니카 폭격 사건을 다룬 작품일뿐만 아니라, 전쟁에 휘말린 민간인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게르니카 폭격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감명받을 수 있는 작품이 되었으며, 또한 게르니카 폭격 사건을 절대 망각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던진 충격이 너무나도 엄청났기에, 사상자 수나 피해규모가 실제보다 과장되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프랑코군이 작정하고 민간인을 죽이려고 전투기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도는가 하면, 사망자가 2천명 안팎에 달한다는 말도 널리 퍼졌지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것도, 7천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는 2천여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분노한 때문이었습니다.
비단 게르니카 폭격사건에서만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폭격이나 학살 사건이 일어난 마을을 거주민이 떠나고, 사건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집계할 때, 마을을 떠난 생존자도 사망자로 집계되는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많은 충격을 준 사건이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규모가 커지고 더 잔혹해지는 일도 많았고요. 이런 상황에서 그 이야기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고 지적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그것에서 그친다면 더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이런 과장된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그만큼 게르니카 폭격사건이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게르니카>의 가치 없는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왜곡된 사실을 토대로 한 선전물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비극과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려진 것보다 적은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무구한 민간인들이 전쟁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변하지도 않지요. 피카소가 접한 뉴스에 비해 게르니카 폭격사건의 실제 사망자가 적었다는 것으로 이 작품을 무가치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무도 아닌 나뭇잎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피카소가 게르니카 폭격 사건의 사망자가 3백명 안팎이라는 정확한 뉴스를 접했다면, 충격을 덜 받고 <게르니카>를 그리지 않았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피카소가 분노한 것은 전쟁의 참화에 무고한 민간인이 죽었다는 것 자체와, 그런 일을 저지른 독재자에 대한 공분이었으니까요. 수백 명이 죽었으면 수천 명이 죽었을 때에 비해 사망자가 적다고 덜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게르니카>를 감상하는 오늘날의 우리도 그래야 하겠지요.
'역사를 만든 예술 > 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벨라스케스의 <궁정의 시녀들>과 마르가리타 왕녀 (0) | 2014.11.22 |
---|---|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시작, 5월 2일 봉기와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0) | 2014.11.01 |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와 영국의 구빈원 (0) | 2014.09.06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1832년 6월 파리 봉기 (0) | 2014.05.10 |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과> 제인 그레이 (0) | 2014.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