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밖의 역사

베르디의 <아이다> 초연이 연기된 진짜 이유, 19세기의 이집트와 보불전쟁

아리에시아 2014. 4. 19. 11:43

오페라 <아이다>의 개선행진곡은 정말 유명한 음악입니다. 요즘에는 좀 덜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외행사에서 웅장한 음악을 틀 때는 <개선행진곡>이 울려퍼질 때가 많았지요. 오페라의 장대한 스펙터클의 대명사같은 장면이기도 합니다. 공연을 하다보면 너무 물량공세에 치중하느라 오히려 음악이 묻힌다는 말도 종종 있을 정도로, 스펙터클한 장관을 보여주지요.

 

1989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공연입니다. 플라치도 도밍고, 에이프릴 밀로, 돌로라 자지크가 주역 3인방을 맡고, 레바인이 지휘한 공연입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행사에서는 흔히 3분 32초 경부터 나오는 음악부터 연주되고는 하지요. 말 그대로 물량공세로 보는 사람의 넋을 뺴놓다가, 마지막 무렵 남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의 연출에서 또 한 번 입을 벌리게 하는 공연이지요.

 

 <개선행진곡> 장면의 이탈리아어-한국어 대역 대본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2012년 아레나 디 베로나 야외극장에서의 <개선행진곡> 장면입니다. 널리 알려진 바로 그 대목부터 시작하는 영상입니다. 합창은 안 나오고 오케스트라 연주만 이어지는 대목이라 자막은 없습니다. 중간에 한 대목에 편집되어 있는 영상입니다.  대형 야외극장에서의 공연으로, 위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에 못지않은 물량공세와 스펙터클을 보여줍니다.

 

 

오페라 <아이다>는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던 베르디에게 의뢰해 작곡된 작품입니다. 하지만 막상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서는 <아이다>가 공연되지 못했고, 대신 베르디의 다른 작품인 <리골레토>가 공연되었습니다. <아이다>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2년 가까이 지났을 때, 비로소 초연되었습니다.

 

<아이다> 초연이 계속 지연된 이유는, 프랑스에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흔히 보불전쟁으로 불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입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인이었으니, 작곡가가 프랑스인이라 작곡가 조국에 전쟁이 나자 작곡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멀고 먼 프랑스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 이집트의 행사에 영향을 미쳐, 중단되고 연기하게 된 것이지요.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어서 그랬던 걸까요?

 

답은 "오페라 의상과 가발, 소품 등을 모두 프랑스 파리에 주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집트에서 고대 이집트를 소재로 한 작품을 공연하는데, 의상을 이집트 현지에서 마련하는 게 아니라 외국에 주문했다는 겁니다.

 

 

19세기 이집트는 고대 이집트와 별개의 문화권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이슬람권인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일신교 권력이 흔히 그렇듯이 옛날 다신교 시절의 문화재를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대놓고 파괴한 적은 거의 없지만, 사람들이 유적을 헤집거나 유물을 가져가는 걸 딱히 제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헐값에 팔아넘기거나,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오벨리스크 하나를 대형 시계 하나와 맞바꾼 적도 있고요.

 

현재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의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바로 이 때 대형 시계 하나와 교환해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 관료들은 모두 이 교환에 적극 찬성했고, 반대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집트 유물 연구를 맡고 있던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이 프랑스인 이집트 학자의 이름은 마리에트로, <아이다> 초안을 구상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베르디는 <아이다> 기획에 별 흥미가 없다가, 마리에트가 소설 초고처럼 쓴 <아이다> 스토리를 보고 흥미가 생겨 <아이다>를 작곡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대형 시계 하나와 맞바꾼, 콩코르드 광장의 그 오벨리스크입니다. <아이다> 원작자이기도 한 프랑스인은 이집트의 보물을 이렇게 허무하게 외국으로 반출시킬 수는 없다고 반대했지만, 이집트의 실무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에게는 쓸모없는 돌조각을 최첨단 시계와 맞바꾼다며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런 판국이니, 고대 이집트 관련 연구가 이집트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습니다. 막상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이집트 발굴이 계기가 되어, 이집트 열풍이 불고 이집트풍 패션이 한참 유행하고 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 의상을 준비할 일이 생기자, 이집트 현지가 아닌 프랑스에 주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전쟁이 나자, 이집트에서 고대 이집트를 소재로 한 작품을 공연할 수 없게 된 것이고요. 이 역설적인 해프닝은 선조가 아무리 찬란한 유산을 남겼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태를 빚어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