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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귀천상혼 규제를 받지 않았을 이유

아리에시아 2024. 7. 5. 20:52

신데렐라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요정이 여주인공 신데렐라에게 유리구두와 화려한 드레스를 선물해서, 신데렐라가 왕궁 무도회에 가게 되는 이야기는 낭만적이고 화려한 동화 같은 이미지에 딱 들어맞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제가 본 적 없는 동화전집 등이 있다면 신데렐라 이야기부터 찾아보고는 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드레스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손꼽을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동화전집의 그림 중 신데렐라의 무도회 드레스가 가장 화려하고 예쁘게 그려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자가 왕자 등 신분 높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는 내용 자체를 일반명사처럼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막상 원전의 신데렐라는 이른바 신데렐라 스토리와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꽤 알려졌습니다. 신데렐라가 정식으로 왕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면, 그 정도의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신데렐라 스토리 중 가장 유명할 페로의 동화 버전, 즉 유리구두가 등장하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완역본을 읽어보면 이 점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페로의 신데렐라 동화에서 신데렐라는 요정과 왕자의 도움 덕분에 계모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신분을 되찾은 것에 가깝지, 신분상승과는 거리가 멀게 묘사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유럽에서는 귀천상혼 제도가 있기 때문에, 신데렐라는 왕족 출신이 아닌 이상 귀천상혼 규제 때문에 왕자와 결혼해도 정식결혼하지 못하고 왕자비가 되지도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꽤 많이 퍼졌습니다.

 

진지하게 분석한다면, 신데렐라 이야기 속 세계관에서 귀천상혼 제도는 애초에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데렐라의 계모는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는 판본도 있는 등, 계모의 신분은 하나같이 낮게 묘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계모는 하나같이 정식 후처이자 안주인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주인의 후처이자 안주인으로서의 권위가 없었다면, 신데렐라를 구박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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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신데렐라 이야기,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

널리 알려진 신데렐라 이야기에는 교훈이나 메시지 같은 것은 도대체가 찾아볼 수가 없지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계모에게 구박받으며 사는데, 구박받고 허드렛일까지 하는 것을 참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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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상혼은 신분이 높은 사람과 신분이 낮은 사람이 결혼하면, 둘 사이의 아이는 부모 중 신분이 낮은 쪽의 계승권만 가지는 제도입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자신과 동등한 신분의 사람과 결혼해야만, 태어난 아이에게 정식 후계자 자격이 법적으로 생깁니다.

 

그리고 귀천상혼은 18세기 즈음까지만 해도 법적으로는 독일어권 쪽 일부 지역에만 있던 제도였습니다. 페로가 신데렐라 이야기를 출판한 것은 17세기인데, 독일어권 이외에 17세기 이전에 법적으로 귀천상혼 규제가 있던 유럽 국가는 덴마크 정도입니다.

 

귀천상혼이 유럽에 널리 퍼진 것은 19세기 즈음부터입니다. 그리고 대개 둘 중 하나입니다. 공주가 독일 쪽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핏줄이 새 국왕이 되어서, 독일 가문의 관습인 귀천상혼도 도입된 사례. 혹은 19세기에 나라가 세워져서 새 왕실이 만들어진 사례.

예외라면 스웨덴 정도일 겁니다. 평민 출생으로 나폴레옹 시대 출세한 장군인 베르나도트가 복잡한 과정 끝에 스웨덴 국왕의 양자가 되고 그 왕위를 이었을 때, 평민 출신 양자라는 신분 때문에 왕실의 입지가 애매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오히려 귀천상혼 제도를 훨씬 강화했다고 합니다.

 

전자의 대표 사례가 러시아 제국으로, 러시아 역사상 표트르 대제 이전까지는 러시아 국내 귀족을 황후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18세기에 표트르 대제는 신분이 낮은 여성을 정부로 삼은 뒤 그 여성과 결혼했지만, 귀천상혼은커녕 그 여성은 엄연히 황후로 대우받으면서 나중에는 예카테리나 1세로 여제까지 됩니다.

그리고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1세의 맏딸이 독일 쪽에 시집가서 낳은 아들이 훗날 러시아의 표트르 3세가 된 후, 표트르 3세의 후손이 독일식 귀천상혼 제도를 러시아에 도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자는 19세기에 유럽에 만들어진 신생 왕국에서는 굉장히 흔한 사례였습니다. 심지어 루마니아 왕국에서는 자국 여성이 왕비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어서, 왕비를 외국 왕족으로 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이전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도 귀천상혼같은 결혼을 꺼리는 인식이 있기는 했습니다. 당시에는 신분과 조건을 맞춰서 결혼하는 정략결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천상혼같은 개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옛 유럽 상류층에서는 그런 식의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규제하는 법은 없는 나라가 많았습니다. 영국이 귀천상혼 제도가 느슨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만, 막상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로 유명한 헨리 8세와 장미 전쟁 때의 에드워드 4세 정도를 제외하면, 20세기 이전에 왕족이 아닌 여성이 정식 왕비가 된 사례가 없다시피합니다.

 

명예 혁명으로 쫓겨난 국왕인 제임스 2세의 첫째 아내였던 앤 하이드가 귀족 작위도 없는 평민 가문 출신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당시 제임스 2세는 어디까지나 둘째 왕자였고, 앤 하이드는 남편이 왕이 되기 전에 죽어서 왕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평민이 영국 왕비가 된 사례라고 하기에는 이래저래 많이 애매합니다.

그나마도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는 신분 낮은 과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비밀결혼하는 바람에, 요크 가문이 흔들려서 최종적으로 장미전쟁에서 요크 가문이 패배하는 결과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말까지 나올 지경입니다.

이것은 해석의 영역이라도 쳐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에드워드 4세가 죽은 후 에드워드 4세가 저 비밀결혼 이전에 다른 여자와 비밀결혼했으니 우드빌의 결혼은 중혼으로 무효이고, 우드빌이 낳은 에드워드 4세의 아이도 왕위계승권이 없는 사생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왔을 때, 그 비밀결혼의 증거란 단 한 명의 증언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요크 가문 전체에서 빠르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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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가 그린 절대악인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1452-1485)는 잉글랜드 요크 왕조의 3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입니다. 헨리 7세 바로 전의 왕이라고 하는 쪽이 더 빠르겠지요. 15세기 말 잉글랜드에서는 30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나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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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일 왕족이 외할머니가 영국 공주라는 이유로 후계자가 되어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한 이후, 20세기가 되기까지 영국 왕비가 된 여성은 모두 외국 공주 출신이었습니다. 이것은 빅토리아 여왕 때에도 여전해서, 빅토리아 여왕이 헨리 8세의 여동생이 공작과 연애결혼한 이후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공주를 외국 왕족이 아닌 자국 귀족에게 시집보냈을 때, 새신부의 친정 가족이던 영국 왕족들은 매우 모욕적인 결혼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비밀결혼 역시 능사가 아니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 중에는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라는 인물이 있는데, 신분이 낮은 여인과 비밀결혼했다가 그 결혼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는 왕족 신분과 공작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성씨조차 사생아에게 붙여주는 방식의 성씨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20세기 영국에서도 왕비감에는 저런 인식이 여전해서,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한 것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8세가 왕세자 시절 서덜랜드 공작의 딸에게 청혼했을 때, 국왕과 왕비가 결혼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 아가씨의 외가 쪽 친척 중 도박빚 때문에 파산한 사람 등 평판이 안 좋은 친척이 있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는데, 왕족 신분의 여성이었다면 본인의 잘못이 아닌 이상 저 정도는 왕세자비 결격사유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당시 왕비이자 에드워드 8세의 어머니였던 메리 왕비도, 부모가 빚더미에 시달리는 입장에다 본인은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이지 정식 왕족 신분은 아니었는데도 영국 왕실에 시집왔던 사례도 있지요.

 

귀천상혼 같은 인식이 있다는 것과, 법적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엄연히 별개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법적으로 귀천상혼 규제가 없었습니다. 페로의 시대에도 그랬고, 그  이후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 스탕달의 고전소설인 <적과 흑>의 초반부에는 오를레앙 공작 가문의 살롱에 드나드는 사람이 그 살롱에서 몽테송 부인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면서, 몽테송 부인이라는 사람이 오를레앙 공작 가문 세력의 중요한 명사처럼 언급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몽테송 부인, 혹은 마담 드 몽테송은 실존인물로, 프랑스의 유력 왕족이었던 오를레앙 공작과 정식 결혼한 귀족 여성입니다.

루이 16세가 그 결혼을 정식으로 인정해서, 몽테송 부인은 귀족 출신이면서 왕족의 정식 부인의 신분을 인정받았습니다. 몽테송 부인은 오를레앙 공작의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몽테송 부인은 루이 16세의 남동생이 왕이 된 <적과 흑>의 시대에, 방계 왕족인 오를레앙 가문의 주요 인물처럼 언급되는 존재가 된 것이지요.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루이 14세의 첫사랑은 재상의 조카딸로, 왕족이 아니라 귀족 신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 만치니라는 그 여성과 루이 14세가 사랑에 빠졌을 때, 궁정 사람들은 그 결혼에 반대했지만, 그 와중에도 왕족이 아닌 마리 만치니가 루이 14세와 결혼하면 그 자녀는 왕위계승권이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는 귀천상혼 규제가 없어서, 국왕이 귀족과 결혼해도 정식 결혼이 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궁정에서 그 결혼을 반대한 것은 루이 14세가 스페인 공주와 결혼한 것이 국익에 훨씬 큰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지, 귀족과 결혼하면 태어난 자녀는 왕위계승권이 없기 때문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후일담을 보면 저 정략결혼은 충분한 의미가 있었는데, 몇십 년 후 스페인 왕실의 후계자가 끊기면서, 저 때 시집온 스페인 공주와 루이 14세의 손자가 스페인 국왕의 친척으로서 최종적으로 스페인 국왕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신생 왕국이 줄줄이 귀천상혼 제도를 도입하던 19세기에도 프랑스에는 귀천상혼 규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왕족이 아닌 귀족 여성과 결혼했는데도, 엄연히 정식 결혼으로 인정받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왕국에서는 왕궁 무도회에 초대받을 수 있을 정도의 귀족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결혼하면 출신 신분이 아니라, 남편의 신분을 따라가게 됩니다. 평민 여성이 귀족과 결혼하면 귀족이 되고, 귀족 여성이 평민과 결혼하면 평민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실제 프랑스 법률에 맞춰서 해석한다면,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부유한 귀족 신분이면서 가정교사 등 평민과 결혼하고 싶을 경우 어떻게든 국왕의 허가를 받는다면 정식 결혼이 되고, 국왕이 저 결혼을 허가하지 않는다면 정식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왕은 남성 귀족이나 방계 왕족이 평민 등 신분 낮은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귀천상혼에 해당할 그런 결혼을 허가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고 합니다.

 

이런 제도라는 것 자체가 국왕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해도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국왕이 허락해야 하는 이상, 국왕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분 낮은 여성을 정식 왕비로 삼을 수도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와 결혼해도 된다고, 국왕 자신의 결혼을 스스로 허가하면 되니까요.

 

심지어 페로가 신데렐라 이야기를 쓰기 불과 몇십 년 전, 신분은 귀족 출신에 불과한 데다가 국왕의 정부였던 여인이 프랑스의 왕비가 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는 공주 출신인 첫째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합의이혼한 뒤, 정부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재혼하려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앙리 4세의 아이를 이미 여럿 낳았고, 저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가브리엘이 낳은 앙리 4세의 사생아들은 왕족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는 등 잠재적 왕족 대우를 받았습니다.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결혼식을 하기 전 죽었는데, 만약 그 때 죽지 않았다면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왕족이 아닌 귀족 출신에 정부였던 여성으로 정식 왕비가 되었을 것이며, 결혼 이후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은 정식으로 프랑스의 왕세자이자 다음 국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조로 꼽히는 작품은 이탈리아 민담 '고양이 신데렐라'로, 한국어판으로는 펜타메로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민담 모음집에서 '고양이 첸네렌톨라'라는 소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민담 판본 역시 그에 대한 상황은 프랑스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 이탈리아에서도 공식적으로 귀천상혼 규제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대공 중에는 가문에서 결혼시킨 첫째 부인은 오스트리아의 황녀였는데, 둘째 부인은 정부였던 사례도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국의 2대 대공이었던 프란체스코로, 얄궂게도 앙리 4세의 둘째 왕비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렇게 대공비가 된 정부는, 족보만 따지고 보면 앙리 4세의 왕비의 계모이자 앙리 4세의 장모격 인물이 되었습니다.

 

신데렐라 이야기에 귀천상혼 이야기를 하려면, 아예 그림동화에 실린 독일 쪽 이름인 아셴푸텔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데렐라의 계모가 평민 출신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신데렐라가 평민 출신이었다면 몰라도, 유명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배경이 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신데렐라가 왕궁 무도회에서 춤출 수 있을 정도의 신분을 타고났다면, 국왕이 마음만 먹으면 정식 결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증을 따질 경우, 문제는 오히려 무도회에서 춤출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된 왕자에게는 진작 가문끼리 정략결혼한 약혼녀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일 겁니다. 이미 약혼녀가 있는데 신분 낮은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이유로 약혼을 취소한다면,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을 만큼 심각한 일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시 왕자가 약혼녀가 없는 상태여야 합니다.

다만 그런 상황이 유럽 왕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을 일은 아닙니다. 약혼녀로 여겨지던 여성이 죽어서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약혼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매우 복잡해서 막상 확고한 약혼 상대가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왕자에게 약혼녀가 있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그 약혼이 무효화되었다는 전개도 유럽 왕실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일부러 가문 세력이 약한 여성을 왕비로 선택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는 출신 가문만 따지면 귀족 태생이고, 아버지가 한때 폴란드의 왕으로 추대된 적은 있지만 왕위에서 쫓겨나서 왕족 신분도 애매했습니다. 명목상 국왕의 딸이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의 기존 세력과 연관되지 않은 외국 공주를 왕비로 삼겠다고 결정한 이후, 그런 세력이나 유대관계를 형성할 정도의 입지도 없던 마리가 프랑스의 새 왕비로 결정되어 국왕과 결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