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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의 공작부인의 의자, 타부레 이야기

아리에시아 2023. 11. 4. 17:00

스탕달의 <적과 흑>은 1830년대 왕정복고기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당하고 프랑스 왕정이 폐지된 이후, 나폴레옹이 집권해서 황제가 되었다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서 황제 자리에서 최종적으로 물러난 이후, 루이 16세의 남동생이 프랑스의 새 왕이 된 시기입니다.

 

<적과 흑>에는 여러 귀족이 등장하며 그 중에는 후작인 귀족과 그 딸도 있습니다. 소설 속 묘사에 의하면 그 딸은 이른바 조건 좋은 혼담이 많이 들어왔을 정도로 인기 있는 아가씨로 그려집니다. 후작은 딸이 공작부인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서 공작보다 훨씬 신분이 낮은 남자와 그 딸이 연애결혼할 상황이 되자, 후작은 딸이 공작부인이 될 거라는 전망을 접어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제가 읽은 번역본에서는 '왕 앞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공작부인이라는 식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601페이지라는 페이지까지 기억하게 될 정도로, 기억에 남게 되는 대목이었지요. 

아마 타부레라는 의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 문장을 읽었다면,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같은 이야기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왕자와 거지>에서는 국왕이 모종의 사건으로 특별히 총애하며 신임하게 된 신하에게, 국왕 앞에서 함부로 의자에 앉아도 되는 권리를 승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과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요.

 

하지만 우연찮게도 당시 저는 이지은의 <기억의 의자: 중세부터 매뉴팩처까지 장인의 시대>라는 책을 읽은 뒤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프랑스 궁정의 타부레라는 의자에 대한 궁정 예법 등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전 <적과 흑>의 저 궁전에서 의자가 바로 그 타부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궁금해져서 인터넷에서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로 읽을 수 있는 <적과 흑> 르팡스어판을 찾아보았습니다. 역시 타부레였습니다.

 

타부레는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 궁정 사람들이 사용했던 의자 중 하나입니다. 이지은의 <기억의 의자>에 따르면, 당시 궁정에서는 타부레를 하사받아 타부레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을 궁정 사람들이 크나큰 영예처럼 여기는 것으로 종종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상 타부레는 의마 자체로는 그 요란한 인식에 비하면 볼품없게 생겼다는 것도요.

등받이도 없는 접이식 의자에, 술이 달린 것을 제외하면 변변한 장식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타부레. 퐁텐블로 궁전에 있는 타부레로, 문 앞에 등받이 없는 접이의자 여러 개가 놓여 있는 형태입니다.

 

프랑스 왕국 절대왕정에서는 이 타부레를 특권처럼 만들었습니다. 공작이나 공작부인, 혹은 그에 준하는 높은 신분이거나 국왕이 특별히 궁전에서 타부레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내려준 사람만이 궁전에서 타부레에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서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 장식이 없는 타부레는 어마어마한 특권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국왕이 함부로 타부레의 특권을 하사하면, 기존에 타부레에 앉을 수 있었던 다른 귀족들이 똘똘 뭉쳐서 대대적으로 반발한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예법 상당수는 19세기 프랑스 왕정복고시기에도 도입되었고, 타부레에 앉을 수 있다는 것 역시 공작부인이나 그에 버금가는 특혜를 인정받은 극소수 인물의 특권처럼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적과 흑>에서 한 후작이 딸이 공작과 결혼할 경우, 타부레에 앉을 수 있는 공작부인이라는 식의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지요.

 

여담으로 타부레 부분은 소설 속에서 워낙 지엽적이어서 주석을 붙이기도 애매한데다 주석을 붙이면 설명이 너무 길어져서인지, 타부레라는 의자를 굳이 언급하지 않는 쪽으로 적당히 번역하는 경우가 꽤 많은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의 <적과 흑> 영어판에서는 타부레 부분을 '코로넷을 쓸 수 있는 공작부인'으로 의역하기도 했지요. 코로넷은 고위 귀족이나 왕족만이 쓸 수 있는 금속 왕관으로, 셜록 홈즈 시리즈 중 '녹주석 보관'으로 번역되는 사건의 보석 왕관이 바로 코로넷입니다. 국왕만 쓸 수 있는 왕관에 비해서는 나름대로 간소한 디자인이지만, 많은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거나 장엄한 디자인의 금속제 관이지요. 그래서 홈즈 시리즈에서도 보물을 뜻하는 보를 사용한 보관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타부레는 물질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것으로도 특권이나 특별한 혜택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사례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타부레보다 훨씬 화려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의자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돈과 권력을 가진 특권층의 사람들이, 왕실이 있는 궁전에서 타부레라는 수수한 디자인의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것을 갈망하며, 타부레라는 의자에 앉기 위해서 여러 노력까지 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