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트에서는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제가 작품 전체를 감상한 적 없는 오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겠습니다. 엄밀하게는 오페레타로 분류되지만, 오페레타는 넓은 의미에서 오페라로 분류되면서,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될 때가 종종 있으니, 이럴 때는 뭉뚱그려 이야기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작품 자체는 거의 잊혀졌지만, 콘서트 등에서는 간혹 일부분이 연주되는 작품은 종종 있습니다. 칼만의 오페레타인 Grafin Mariza도 제가 그렇게 접하게 된 작품이었습니다. 한국어로는 일반적으로 마리차 백작부인으로 번역됩니다. 2024년인 현재까지, <마리차 백작부인>은 한국어 자막이 첨부된 영상물이 만들어진 적도, 대본의 한국어 번역 완역본이 만들어진 적이 없는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2015년 빈 국립 폭스오퍼 신년음악회에서, 소프라노 안드레아 로스트가 <마리차 백작부인> 중 '집시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을 부릅니다. 한국어 자막이 있습니다.
제가 모르던 작품이 나와서, 호기심에 <마리차 백작부인>에 대해 검색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번 블로그 글 주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어 전체 번역본은커녕 변변한 한국어 자료도 없었고, 작품의 줄거리 정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백작부인'이라는 번역어를 고려했을 때, 그게 나름대로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오페레타의 줄거리 자체는 간단합니다. 여주인공은 마리차 백작의 딸입니다. 그리고 오페레타에서 흔히 나올 법한 여러 해프닝을 거쳐, 남주인공과 맺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백작부인'이라는 번역 때문에, 저는 줄거리만 읽다가 졸지에 반전을 맞이하는 상황이 되었더랬습니다.
백작부인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여주인공이 백작과 결혼해서 백작부인이 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오페레타 줄거리에서 웬 남작이 나와서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했습니다. 다른 등장인물, 즉 백작이 나와서 여주인공과 결혼하며 여주인공이 백작부인이 되는 결말이 나올 여지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차 백작부인>의 결말에서, 여주인공은 오페레타 내내 이야기가 전개된 그 남작과 맺어지게 됩니다.
제목에서는 백작부인이라면서, 막상 작품 내용은 백작의 딸이 남작과 결혼하는 내용이라니요! 심지어 원제의 '그라핀'은 백작부인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가 맞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던 걸까요?
그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된 건, 엉뚱하게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에 대해 찾아보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이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은 백작의 셋째 아들이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형들은 살아 있었습니다. 백작의 셋째 아들이 형이 줄줄이 있는데 백작이 된다니요? 장남이 후계자가 된다는 발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심지어 셋째 아들인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의 아들들도, 막내아들까지 모두 백작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독일에서는 백작의 아들은 모두 백작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러시아도 저렇습니다. 그리고 백작의 딸도 백작의 여성형에 해당하는 호칭을 쓸 수 있습니다. 알파벳 문화권에서는 영어에서 여왕과 왕비가 똑같이 '퀸'인 것처럼, 백작의 부인인 백작부인과 여성 스스로 백작인 여백작이 똑같은 호칭을 쓸 때가 많습니다. 귀족 호칭에서는 저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샤이러의 <제3제국사>는 2023년 책과함께 출판사에서 완역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백작의 딸을 백작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어머니가 윅스퀼-귈렌바트 백작 가문의 딸이라고 언급하면서, '백작녀'라고 쓴 것입니다.
여담으로 제3제국사는 1990년대에도 번역본이 나왔었는데, 백작의 딸을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백작부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백작의 딸과 백작부인이 독일어로는 모두 그라핀인데, 흔한 번역어인 백작부인이라고 쓴 모양이었습니다.
이건 그나마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의 어머니가 백작과 결혼했으니 어차피 백작부인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괴링의 아내가 포크 남작 가문의 딸이라고 말할 때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독일어권에서 백작의 딸도 백작부인과 여백작이 사용하는 그라핀 호칭을 사용하는 것처럼, 남작의 딸에 대한 호칭 역시 남작부인이나 여성 남작의 호칭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1990년대 번역본에서는 저 부분을 포크 '남작부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남작의 딸이 귀족이 아닌 괴링과 결혼했는데 난데없이 남작부인으로 표시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독일어에서 백작의 딸에게 그라핀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직역하면 여백작이 되겠지만, 의역 표현에 가까운 백작녀가 백작의 딸에 대한 호칭으로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백작이라고만 한다면, 백작 가문의 여성 가주라고 인식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테니까요.
막상 독일어권에서는 여성이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백작이라는 번역이 혼란스럽게 느껴질 가능성이 더욱 높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어권은 다름아닌 살리카법 문화권으로, 즉 남계 남성 후손, 즉 아들의 아들의 아들... 식의 남성 후손만 후계자가 될 수 있고, 여성은 후계자가 될 수 있기는커녕 여성의 남자 후손조차 후계자 권리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https://ariesia.tistory.com/324
살리카법에 대해서
살리카법은 흔히 동양식 남계 상속처럼, 남자 후손만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법처럼 여겨지고는 합니다. 이른바 왕위계승의 살리카법은 대개 그런 의미로만 통용되었기에, 결과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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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차 백작부인>이라는 번역에 호칭 번역에 대해, 백작의 딸에 대해 간결한 호칭으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전 '마리차 백작녀'가 백작부인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백작녀라는 호칭이 한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아서 낯설기는 하겠지만, 백작의 딸이 남작과 결혼하는 이야기의 제목에 백작부인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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