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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프게니 오네긴>과 무위도식 과시 댄디 문화

아리에시아 2022. 12. 3. 16:22

예전에도 오페라로 블로그에서 언급한 적 있는 <예프게니 오네긴>은 푸슈킨의 작품을 원작으로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오페라로, 러시아 오페라 중 가장 인기 있고 널리 공연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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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과일 따는 아가씨들이 노래를 부르다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푸슈킨의 동명의 작품을 오페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러시아 문화권에서도 손꼽히는 인기를 누리고 있고, 러시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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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인공인 오네긴은 이른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주인공다움과는 거리가 멀지요. 편지로 사랑고백하는 아가씨를 거절한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별 것도 아닌 일로 친한 친구와 결투를 하고 친구를 총으로 쏘아 죽게 하고, 자기가 거절했던 아가씨가 나중에 수도 사교계에서 공작부인이 되어 나타나자 자신이 사랑하게 되었다면서 매달리는 등.....

그나마 딱히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캐릭터는 아닌지라, 저런 캐릭터가 왜 작품에서는 멋지게 묘사되는지 이해를 못 하는 사태까지는 안 가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페라 버전을 먼저 봤는데, 오네긴이 왜 저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원작까지 읽었습니다.

하지만 오페라만 봐서 오네긴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 부분 중, 원작을 봤다고 이해하게 된 대목은 딱히 없었습니다.

오히려 원작을 읽으니 오히려 이해가 더 안 됐지요.

개인적으로 원작에서 제일 이해가 안 된 부분은 오네긴이 하루에 세 시간씩은 거울 앞에 있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맥으로 보면 일단 오네긴이 그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라는 묘사 같기는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거울 앞에서 하루에 세 시간씩 뭘 한다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여자가 그랬다면, 전 오스트리아 제국의 엘리자베트 황후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정도로 넘어갔을 겁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으로 유명했고, 하루에 머리스타일을 꾸미는 데 세 시간씩 걸렸고, 가느다란 허리와 몸매를 과시하기 위해서 옷을 몸에 딱 맞도록 옷을 입은 상태에서 바느질을 했기 때문에 옷을 입는 데에도 세 시간씩 걸리고는 했다는 엘리자베트 황후.

막상 황실 의무는 대놓고 방치하고, 남편인 황제 돈으로 초호화판 여행을 다니면서 저랬다는 건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그래놓고 황후 본인은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자신은 불행하다느니 자유로워지고 싶다느니 등의 시를 썼다는 것도 넘어가겠습니다. 

 

19세기 초반 배경에, 아무리 멋부린다지만 남자가 도대체 뭘 한다고 하루에 거울 앞에 세 시간씩 있는가?

이 궁금증이 풀린 것은 훨씬 뒤, 계정민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패션의 권력학>을 읽은 뒤였습니다.

 

19세기 초. 이른바 유한계급인 귀족계층에서는 자신이 돈을 벌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유행합니다. 이른바 댄디의 시초가 바로 이것입니다. 거북이와 함께 산책하는 등, 도저히 쓸모 없고 의미 없어 보이며 돈은 돈대로 드는 행동을 하면서, 그만큼 여유롭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남자의 패션에도 시간과 돈과 정성을 쏟는 유행이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패션에 신경 쓰는 남자의 선구적 존재로 복식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국의 브러멜입니다. 그 전의 남자 의상은 화려한 자수와 비싼 옷감, 호화로운 보석 장식 등으로 과시하는 쪽을 중시했다면, 브러멜은 멋부리는 남자 패션을 혼자서 만들어내다시피 했지요.

이 책의 96페이지와 97페이지에서 브러멜의 패션 관리를 언급하는 대목을 보면, 오네긴이 도대체 뭘 하느라 하루에 세 시간씩 거울 앞에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은 결코 복잡하거나 현란하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사람의 미용사가 필요했다... (중략) 브러멜은 매일 아침 화장대에서 긴 시간을 보냈고, 리넨에 티끌 하나 없고 크라바트에 주름 하나 없게 만들기 위해 비용을 아낌없이 지불했다. 패션에서 완벽을 추구했던 그의 면모는, 넥타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바트에 그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브러멜은 외출을 위해 몸단장을 할 때 크라바트를 매는 데 2시간 가까이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