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파로 등장했던 풍조가 시간이 흐른 뒤에 전통파가 보수파가 되는 일은 아주 흔합니다. 주류가 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적도 많지만, 자신이 바로 얼마 전까지 공박했던 수구적인 입장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지요. 때로는 한때 전통파였던 것이 세월이 흐른 뒤, 혁신파였다가 지금은 전통파가 된 풍조에 맞선 또다른 혁신파가 되기도 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복고풍이 혁신적인 시도처럼 여겨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연주와 고음악 열풍은 한때 잊혀졌던 옛것이 새로운 도전으로 재등장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현대 악기는 19세기 초반을 훨씬 넘긴 뒤에야 비로소 정립되었습니다. 19세기 초반 이전에 작곡된 음악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악기를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지요. 하지만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옛날 악기로 작곡된 곡을 현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정석이었습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현대 악기 시대 이전에 작곡된 음악은 그 시절의 악기로 연주하자는 시도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동향을 일러 원전연주, 정격연주, 시대연주 등 다양한 호칭이 생겨났는데, 현재는 시대연주라는 단어가 가장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시대연주 시절의 음악을 일컬어 '고음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19세기도 옛날인데 유독 19세기 이전의 음악만 고음악이라 부르는 데에는, 이런 연원이 있습니다.
시대연주는 비단 악기뿐만 아니라, 연주단의 규모나 연주방식 등도 18세기와 그 이전의 것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차르트 시대까지만 해도 오케스트라 규모가 30명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템포도 오늘날 표준보다 훨씬 빠르며 음도 반음 정도 높은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시대악기는 당시 음악연주에 대한 현대 연구를 토대로 이런 풍조까지 재현합니다. 그래서 같은 곡을 연주해도 시대악기 연주는 현대악기 연주에 비해 소리가 작고 음이 높게 들립니다. 성악곡을 부를 때도, 시대악기로 연주할 때에는 현대악기로 연주할 때보다 음이 높게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연주할 때 즉흥적인 기교를 굉장히 많이 넣었기 때문에, 헨델 등 아예 연주자가 기교를 넣을 것을 감안하고 음표를 설렁설렁 채워 곡을 쓰는 작곡가도 많았습니다. 헨델은 영국 최고의 오페라 가수들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헨델이 쓴 오페라 아리아 중에는 시골 성당 합창단의 노래로 작곡한 바흐의 음악보다 음표가 적은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풍조를 감안하고 곡을 썼기 때문입니다. 시대연주 이전에는 악보대로만 연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시대악기 연주에서는 이런 곡을 연주할 때에는 즉흥기교도 많이 넣지요.
하프시코드. 피아노의 전신이 된 악기로, 시대연주의 상징과도 같은 악기입니다. 쳄발로, 클라브생, 클라비쳄발로 등으로도 불립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굉장히 대중적인 악기였고 많은 하프시코드 곡이 작곡되었으나, 피아노 이후 거의 완벽하게 소멸되어 사라지고 하프시코드 곡은 피아노곡으로 전용됩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시대연주 사조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재등장하게 됩니다.
시대연주와 현대악기는 같은 곡을 연주해도, 완전히 다른 곡처럼 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바로크 시대의 기악곡이 그렇지요. 그 중에서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피아노로 연주했을 때와 바흐 시절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로 연주했을 때, 완전히 느낌이 달라지는 곡의 대표격으로 손꼽힙니다.
글렌 굴드가 1981년 피아노로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2012년 Michael Tsalka 가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입니다. 윗 영상의 곡과 같은 악보로 연주하는 것 맞습니다.
시대연주는 비단 오페라뿐만 아니라 음악 전반에서 시도되었는데, 오페라에서는 시대악기와 현대악기의 차이점이 특히 뚜렷이 드러납니다. 현대악기로 녹음된 20세기 모차르트 오페라 레퍼런스 음반과 아르농쿠르, 르네 야콥스 등이 최근이 녹음한 시대악기 연주를 들어 보면, "이거 같은 곡 맞아?"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악기의 느낌도 완전히 다르고, 성악가의 목소리 느낌도 다른 경우가 많고, 심지어 지휘 템포조차 차이가 날 때가 많습니다. 특히 20세기 현대악기 연주는 모차르트의 악보대로만 연주했는데, 시대연주에서 악기와 노래에 악보에는 없던 즉흥기교가 잔뜩 들어간 것을 들으면, 같은 곡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시대연주는 '작품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현재 상영 순서가, 모차르트의 원래 의도와는 달랐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초연에서 1인 2역 배역이 있었기 때문에, 원래라면 연달아 나오는 장면의 순서를 바꿨다는 것입니다. 시대연주에서 연구해 재배치한 순서는 일반적인 버전보다 훨씬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평을 들으며, 오늘날 현대악기로 연주할 때에도 그 순서를 따르는 경우가 있을 정도입니다.
현대악기가 처음 등장하던 시절, 오늘날 시대악기나 원전악기라 불리는 그 시대의 악기들은 음량이 작거나 연주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로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백여년의 세월이 훌쩍 흐른 뒤에는, 또다른 새로운 사조로서 등장했지요. 오늘날 유럽에서는 바로크와 모차르트 음악은 시대악기로 연주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서, 오히려 현대악기가 19세기 이후의 음악만 연주하는 풍조에 대해 쓴소리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유럽 밖에서는 아직 시대악기 시절 음악도 현대악기로 연주하는 경우가 여전히 대세지만, 시대연주와 고음악도 음반 카테고리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으며 애호가와 관련 연주회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 전통파였을 것을 온전히 되살리는 것이 혁신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대연주는 잘 보여줍니다. 이 시대연주 사조를 이끌었던 것은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68혁명의 주역 세대였다는 점에서, 음악 외적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음악 밖의 세계의 변화가, 음악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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