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요? 노래 부를 핑계를 대려고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런 설정을 마구 집어넣은 것 말입니까? 작품이라 부르며 평가할 가치도 없지요!"
-볼테르의 1759년 소설, <캉디드> 중에서-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진 오페라 작품은 모차르트 작품에서 시작합니다.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마술 피리>, <코지 판 투테> 등 모차르트 오페라가 18세기 작품이고, 베르디, 푸치니, 바그너,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등은 모두 19세기 이후 활동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오페라란 원래 모차르트나 그 이후의 작품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를테면 비극적인 오페라의 경우, 줄거리 앞뒤는 들어맞지만 신파로 일관한다는 식의 평이 주류지요.
하지만 모차르트 이전 18세기의 오페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오페라란 "오페라 가수가 노래 실력 뽐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짜임새 있는 줄거리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어떻게든 등장인물이 자기 심정을 토로할 구실만 만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는 건 기본이요, 캐릭터가 난데없이 바뀌는 일도 종종 일어나지요. 게다가 거의 무조건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에, 허탈하게 갈등이 봉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녀에게 맞서는 기사 일행이 하나하나 비장하게 죽어갔는데 마녀가 죽자마자 모두 부활한다든가, 가문의 원수끼리 오페라 내내 서로 죽자사자 싸웠는데 "그 원한은 사실 오해였대요"라는 편지 한 장이 배달되자마자 화해하고 해피엔딩이 된다든가, 심지어 아무런 계기 없이 악역이 갑자기 개과천선하며 해피엔딩이 되기도 합니다.
게다가 음악이나 노래는 무턱대고 화려하고 우렁찬 선율이 태반이었습니다. 노래 실력을 뽐내기 위해 노래부르는 것이라서, 등장인물이 슬프거나 두려워하는 등 움츠러드는 상황에서도 화려하고 우렁찬 노래가 이어지지요. 이 역시 오페라 세리아의 극적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비극적 오페라'라는 오페라 세리아란 대개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발랄한 오페라 부파가 그토록 선풍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오페라 세리아에는 극적 짜임새라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오페라 부파는 캐릭터가 살아숨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유명한 오페라는 등장인물이 슬플 때는 슬픈 멜로디의 노래를 부르고, 줄거리는 신파일지언정 적어도 캐릭터의 앞뒤는 맞고, 오페라 내에서 원인과 결과도 딱딱 언급되는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모차르트와 모차르트 이후의 오페라에서는 이런 부류가 주류지요. 19세기 초 벨칸토 오페라는 18세기 바로크 오페라의 줄거리에 비하면 고전주의 작품 수준의 줄거리인데도, 내용이 얄팍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있을 정도예요.
이런 '모차르트 이후 오페라'의 원류가 된 사람은 글루크입니다.
크리스토프 발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 ~ 1787)는 당시의 오페라가 진부하며, 화려한 선율을 집어넣는 데 치중하느라 오페라의 극적 짜임새나 극의 흐름 등을 압살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극작품이 아니라 노래 경연장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지요. 당시 풍조는 그런 것을 선호했습니다. 가수의 기교를 감상하고 싶어하는 관객이 훌륭한 극작품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보다 훨씬 많았고, 자연히 가수의 위상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고, 그러다보니 새 오페라를 만들 때에는 작곡가나 대본가보다 가수의 의향을 우선했습니다. 자신에게 배정된 아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곡가에게 자신의 취향대로 새로 작곡하라고 주문하기도 하고, 심지어 작곡가에게 말 한 마디 없이 공연에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아리아로 바꿔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리아에 장식음을 넣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오늘날에는 상상도 안 될 일입니다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모차르트도 가수들의 이런 요구에 관련된 일화가 여럿 있고요. 모차르트의 첫 정규 오페라 작품인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1770)> 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가수들이 다른 작곡가의 노래를 가져오지 않고, 모차르트가 작곡한 음악만을 불렀다는 것을 감격스럽게 여기는 편지를 쓴 적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아내의 언니가 자기가 공연하는 오페라의 아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새로 아리아를 써 달라고 하자, 정말로 아리아를 작곡해 주기도 했습니다. 바로크 오페라에는 합창 외에 주요인물끼리 부르는 중창은 거의 없고, 시종일관 아리아로만 흘러넘치는데, 그 역시 이런 경향에서 비롯합니다. 자기 노래를 뽐내고 싶어하는 가수들이 노래 실력이 돋보이는 독창을 훨씬 더 선호했고, 대다수의 관객들도 그랬으니까요.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에서는 이처럼 무턱대고 화려한 아리아가 나오는 것이 특징입니다.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에서는 화려한 아리아의 비중은 덜했지만, 극적 짜임새라는 측면에서는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발레 등 무용의 비중이 굉장히 높았고, 어떻게든 발레 장면을 집어넣기 위해 억지스러운 설정을 만들어넣은 뒤, 발레 공연을 한답시고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글루크는 화려한 노래를 넣기 위해 줄거리를 집어넣는 게 아니라,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음악을 쓰고자 했습니다. 기교를 한껏 과시하는 대신, 단순한 선율에 등장인물의 감정을 불어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글루크의 이탈리아식 오페라에는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아리아가 없었고, 프랑스식 오페라에는 발레가 없었습니다. 글루크의 악보를 본 공연진들은 영 내키지 않은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첫째로는 가수나 오케스트라에게 익숙한 방식과 너무나도 달랐고, 둘째로는 '오페라의 인기 비결'로 여겨지던 것을 빼버렸으니 관객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글루크의 오페라를 연습하자, 공연단이 태업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글루크의 오페라가 빈에서 첫선을 보이자마자, 진부하고 경직된 당시 오페라에 식상한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습니다.
오늘날 고전으로 남은 오페라는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의 직계입니다. 그래서 글루크의 작품은 고전 오페라에 익숙한 사람이 감상해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지요.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를 감상할 때에는 "줄거리에는 신경 쓰지 말자. 무조건 노래만 듣자. 자막이 없으면 내용을 상상해서 노래만 듣자. 그게 실제 내용보다는 짜임새가 있을 거다."라는 식의 마음가짐으로 보아야만 그나마 감상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것과 대조적입니다. 모차르트 이후 오페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무 각오 없이 모차르트 이전 오페라를 감상했다가는, 황당무계하고 억지스런 설정이 쏟아지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음악이나 노래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상황이나 노래 가사가 어떻든 무조건 화려하고 기교 넘치는 노래만 나오는 걸 보고, 그 분위기에 도저히 몰입을 못 한다거나요.
글루크의 대표작인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공연의 ktv '공연초대석' VOD입니다. 국립오페라단의 2010년 공연으로,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공연초대석은 80분이라는 방영시간에 맞추느라 오페라를 방영할 때는 대개 많은 부분을 편집합니다만,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80분 미만의 작품이라 편집된 부분이 없습니다.
http://www.ktv.go.kr/program/contents.jsp?pcode=100961&cid=340410&item=&keyword=&gotoPage=6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오페라로, 1762년 초연되었습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각각 오르페우스의 에우리디케의 이탈리아식 발음입니다. 신화에서 유명한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갔고, 오르페우스의 음악에 감동한 저승에서는 에우리디케를 보내줍니다. 저승에서 나갈 때까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보면 안 된다는 조건을 붙여서요. 하지만 너무나도 에우리디케를 그리워하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저승에서 나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버리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실의에 빠져 에우리디케만 그리워하던 오르페우스는 결국 불행하게 죽고 말지요.
글루크의 오페라에서는 그리스 원전과 달리 해피엔딩이 됩니다. 에우리디케를 잃고 슬퍼하던 오르페우스에게, 오르페우스의 사랑에 감동한 신들이 한 번 더 자비를 베풀었다는 식으로요. 이것을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던 오페라계의 구습에 여전히 얽매여 있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해피엔딩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납득할 만한 설정의 해피엔딩을 만들어냈는지로 판단할지는, 감상하는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글루크의 개혁은 프랑스에서도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엄정한 륄리의 오페라와 선율이 풍부한 라모의 오페라의 논쟁,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식 오페라 부파와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에 대해 우열논쟁이 일어났던 부퐁논쟁, 다음에는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이 프랑스 음악 사교계를 휩쓸게 된 것이지요. 자연스럽고 짜임새 있는 글루크의 오페라를 환영한 사람도 많았고, 익숙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사람 역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음악과 정치가 서로 맞물린 프랑스 문화 풍조는 이번에도 음악에 정치적 구도를 끌어옵니다. 당시 프랑스 왕세자비는 마리 앙투아네트였고, 글루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 시집오기 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음악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글루크의 작품이 프랑스에서 공연되자, 왕세자비 스승의 작품을 관람하는 것은 왕세자비의 정파에 가담하는 것이며, 그 공연을 관람하지 않거나 글루크에 대조되는 성향의 작곡가의 작품을 관람하는 것은 왕세자비와 정치적으로 대립한다는 식의 구도가 만들어지고 맙니다. 막상 마리 앙투아네트는 옛 스승의 작품이 공연된다는 말에 별 생각 없이 여러 번 관람한 것이 전부였는데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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