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공연에는 대부분 인터미션이 있습니다. 몇 시간짜리 오페라를 연속해 상연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쉬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성격이 급했던 것인지, 인터미션 시간에 짧은 단막 오페라를 공연하는 곳이 생겨납니다.
당시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는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다루는 '비극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오페라 세리아가 주류였습니다. 이러한 오페라 세리아를 공연하는 도중, 왁자지껄하고 유쾌하고 짧은 희극 오페라를 기분전환 삼아 공연하게 됩니다. 이러한 단막 희극 오페라 가운데, <명예로운 포로 Il pirgioniero superbo>라는 오페라 세리아의 인터미션 공연용으로 작곡된 <마님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페르골레시가 작곡한 <마님이 된 하녀>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제목처럼 재치 있는 하녀가 이런저런 해프닝을 계획하여 여차저차 주인나리와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작품이지요. 하지만 이 짧은 작품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신드롬을 일으킵니다. 하녀 세르피나가 주인 우베르토에게 깜찍하고 애교 있으면서도 능청스럽게 행동하는 장면들을 보고, 당시 관객들은 몰입해 관람하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마님이 된 하녀>가 얼마나 인기를 끌었던지, 원래 공연하던 오페라 세리아 작품에는 관심도 없고, 인터미션의 이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이 몰려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님이 된 하녀>를 벤치마킹한 단막 희극 오페라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단막 희극 오페라는 얼마 후 '오페라 부파'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지요.
<마님이 된 하녀>의 '세르피나를 생각해줘요 A Serpina penserete'를 부르는 공연 장면입니다. 능청스러운 세르피나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아리아입니다. 겉으로는 주인나리에게 구슬프게 이별을 작별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하다 보면, 주인 나리가 아쉬워져서 날 붙잡겠지."라고 궁리하는 장면입니다. 주인 나리가 볼 때와 주인 나리가 없을 때 자막은 없습니다.
'세르피나를 생각해줘요' 이탈리아어-한국어 번역 대역 대본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이며, 문법과 이름 표기를 약간 수정했습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오페라 부파는 막상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오페라 작품이 나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만, 엉뚱하게도 프랑스에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사태의 단초가 됩니다.
<마님이 된 하녀>와 오페라 부파가 프랑스에 상륙해 큰 인기를 끌면서, 프랑스에서는 '오페라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한바탕 일어납니다. 18세기 프랑스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가 그랬듯이 신화를 소재로 하거나, 왕자, 공주 등 권력자가 진지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품이 대세였습니다. 왕실의 후원 하에 공연되는 작품인지라 이런 경향은 더욱 강했고요. 륄리는 이 방면에서 알파와 오메가나 다름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라모는 륄리와 판이한 음악 성향을 선보이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오페라의 소재나 줄거리는 륄리가 정립한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서정비극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탈리아 오페라가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부파'에서 이름을 따온 '부퐁 극단'이 프랑스에서 공연하여 인기를 끌자, 그 달라진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립니다.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는 장엄하고, 웅장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고, 심각했습니다. 그만큼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이기도 했지요. <마님이 된 하녀>가 인기를 끌면서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의 풍조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우며, 유쾌하고 발랄한 이탈리아식의 오페라 부파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서정 비극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진지하고 장엄한 전통 형식의 오페라가 진정한 오페라이며, 이탈리아식 오페라 부파는 깊이가 없으며 경박하다 못해 천박하다는 논지로 반박했고요. 그리고 륄리와 라모의 대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설전이 한바탕 펼쳐지지요. 이 주제로 논쟁하다가 실제로 결투한 사례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두 계열의 음악도 판이했는데, 어떤 계열의 음악이 완성도가 더 높은지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논쟁합니다. 륄리-라모 논쟁 때 그랬던 것처럼, 오페라 부파 논쟁 역시 음악계뿐만 아니라 사교계, 학계, 교양인을 자처하는 프랑스인들의 세계 전반에 걸쳐 치열하게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오페라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의 특성을 논하는 경지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 논쟁은 부퐁 극단의 이름을 따 '부퐁 논쟁'으로 알려지게 되지요.
정치적으로는 일단 프랑스 고전 오페라 지지측이 오페라 부파 지지측을 압도했지만, 오페라 부파 측이 패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식 오페라 부파라고 할 수 있는 '오페라 코미크' 장르가 탄생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으니까요.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는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 귀족 사교계 문화가 몰락하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지만, 오페라 코미크는 대형자본의 후원 없이도 자생적으로 명맥을 잇고 발전하여 프랑스 희극 오페라 장르로 자리잡게 됩니다.
관객들은 결국 자신이 보고 싶고,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어떤 작품을 더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작품이 더 뛰어난지에 대한 논쟁은 과연 얼마나 의미있는 것일까요? 결국에는 더 많은 호응을 이끌어낸 작품이 역사에 남을 텐데요. 부퐁 논쟁은 어느 장르를 더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어느 장르가 더 우월한지에 대한 "예술 우열 논쟁"이었으니까요.
'오페라와 역사의 만남 > 전통파와 혁신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 오페라의 시작,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0) | 2015.09.18 |
---|---|
복고가 혁신이 되다, 시대연주와 고음악 (0) | 2014.06.07 |
고전 오페라의 원류,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 (0) | 2014.03.01 |
번외편-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 (0) | 2014.01.04 |
18세기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륄리와 라모 (0) | 2013.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