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전통파와 혁신파

현대적 오페라 연출의 시작, <니벨룽의 반지> 1976년 바이로이트 공연

아리에시아 2015. 9. 26. 11:59

바그너가 작곡해 1876년 초연된 4부작 연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는 초연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내용이나 묘사도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이 많았지만, 작품의 스타일이 그때까지의 오페라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거나 장대한 선율의 아리아가 나오는 오페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바그너의 오페라는 아리아는 없고 대사만 줄줄 늘어놓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의 오페라에 큰 영향을 받았고, 20세기에는 바그너처럼 아리아 없이 가수들을 독백체로 가사를 처리하며, 오케스트라 선율로 작품의 내용을 표현하는 오페라가 주류가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니벨룽의 반지>가 초연된 지 100주년인 1976년, 바그너의 오페라는 또다시 논란의 한가운데에 휘말립니다. 그리고 이 논쟁도 오페라에서 새로운 경향을 낳고, 그 경향이 후대에 널리 퍼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1976년, 바이로이트 극장에서는 <니벨룽의 반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계획했습니다. 바이로이트 극장은 바그너 작품의 성지와 다름없는 곳입니다. 바이에른 국왕이 바그너를 전폭적으로 후원하던 시절, 바그너의 작품을 바그너가 구상한 대로 연주하는 데에 최적화된 무대를 기획해서 건설된 극장입니다.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축제로 불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리는 장소지요. 바그너 생전 바그너가 구상한 대로 공연하게 위해 기획된 극장인만큼 바그너와 동의어로 여겨지며, 바그너의 작품만을 공연합니다.

 

바이로이트 극장 전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그것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납니다. 파트리스 셰로가 연출하고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1976년 공연이, 폭풍같은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지휘를 맡은 피에로 불레즈와 연출을 맡은 파트리스 셰로는 모두 프랑스인이었는데, 독일의 대표적인 오페라의 100주년을 그 오페라의 성지에서 기념하는 기획을 독일인은커녕 독일어권 사람도 아닌 프랑스인이 맡았다는 것부터가 논란을 빚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런 공연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징성 측면에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오페라가 막상 공연된 뒤에 불러일으킨 논란에 비하면, 이것은 해프닝 정도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니벨룽의 반지>는 신화시대를 배경으로 신과 영웅이 등장하는 오페라입니다. 신과 영웅이 등장하며, 신화와 전설을 만들어나가는 이야기지요. 작품 내에서 직접 묘사되는 배경은 신들이 거주하는 성, 거대한 신목이 근처의 집, 군주의 궁정 등입니다. 그런데 파트리스 셰로는 이 이야기를 신화 세계가 아닌, 현대 도시의 변두리쯤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연출했습니다.

 

 

오페라 첫 장면은 라인의 처녀라는 조연 배역이 세 명 등장해서 황금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해주는 대목인데, 이 배역을 맡은 가수가 이런 연출로 출연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면서 공연에 격렬하게 항의하는가 하면, 배역을 사실상 포기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바그너는 이 첫 장면에서 강 깊은 곳에서 라인강의 처녀 세 명이 헤엄치며 등장한다는 지문을 써 놓았고, 그때까지 공연에서는 바그너의 무대지시를 따라 물을 표현한 무대장치를 설치해 이 장면을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연에서, 라인강의 세 처녀는 강 깊은 곳이 아니라 오래된 철교 같은 곳에서 등장합니다.

 

이 뒤로 펼쳐지는 장면들에 비하면, 라인의 처녀 장면은 그나마 다리는 물과 연관된 구조물이라도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신들이 거주하는 성인 발할라 성을, 낡은 공장 폐허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무대장치로 표현했거든요. 그 외에도 이런 식의 연출로 일관한 공연이었습니다.

 

당연히 한바탕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시골 변두리 극장도 아니고, 당대 최고의 가수를 모아서 그 작품에 초연된 장소에서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만큼 전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공연이었는데, 그때까지 공연되었던 연출이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완전 딴판의 모습을 보여주었느니까요. "신과 영웅이 등장하는 신화적인 작품을 공연하면서, 무슨 빈민촌을 만들어놓았다." 라는 식으로, 이 연출에 격렬히 반발하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반발 정도가 아니라, 항의가 쏟아지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아에 반해 신선하고 독특하다고 옹호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나같이 비난이 쏟아지기만 했다면 혹평받은 공연으로 남았겠지만, 호평하는 사람도 많았기에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은킨 공연으로 기록되었지요.

 

그리고 사반세기가 흐른 오늘날, 이 1976년의 피에르 불레즈 지휘-파트리스 셰로 연출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영상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영상을 선정할 때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공연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100주년 기념 공연인만큼 당대 최고의 가수진이 총출동한 덕이 크지만,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연출도 오늘날에는 높이 평가받고 있지요. 현대적 무대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절묘하게 등치시켰다는 호평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니벨룽의 반지> 100주년 공연 이후, 오페라의 무대를 현대로 옮긴 공연이 점차 등장하게 됩니다. 하인과 주인나리가 등장하는 오페라가 있다면, 등장인물에게 현대의 옷을 입히고 사장님과 직원으로 연출하는 식이지요. 21세기에서 유럽, 특히 독일 지역의 공연에서는 이런 식의 '현대적 연출' 오페라가 대세입니다. 오늘날 이른바 '현대적 연출'이 주로 등장하는 것에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작용한다고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우선 무대의상이나 배경장치 등을 현재 시판되거나 사용하고 있는 의상과 가구 등으로 채울 수 있으니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을 듭니다. 아마 대학교 공연에서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와 푸치니의 <라 보엠>이 유난히 인기 있는 것과 연관될 듯합니다. <코지 판 투테>는 등장인물이 단 여섯 명이며, 합창단이 나오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무대 뒤에서 소리만 들려도 무난한 장면이며, 무대도 집 안인지라, 무대설치비용이나 의상비가 적게 들 오페라입니다. <라 보엠>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오페라로서, 2막에서 무제타라는 캐릭터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오늘날 집에서 입는 의상이나 현대 정장 정도로도 충분히 의상연출을 감당할 수 있는 작품이지요. 현대적 연출은 무대장치를 극도로 절제하는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연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대적 연출이 비용 절감을 위해서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 줍니다.

 

등장인물의 처지나 상황을 현대적으로 배치해서,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사전지식 없이 본다면, 남주인공이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며 인기 많은 아가씨와 커플이 되었더니 오히려 사교계에서 외면당하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습니다. 여주인공은 그냥 인기 있는 아가씨가 아니라, 한국식으로 번안한다면 황진이쯤 되는 고급 기생인 셈인데, 사전지식 없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모습만 보면 이런 부분을 포착하기 힘들거든요. http://blog.daum.net/ariesia/76 그런데 현대적 연출에서 여주인공이 오늘날 인기 있는 접대부가 입을 법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면, 이런 부분이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와닿는다는 겁니다. 100주년 기념 바이로트의 <니벨룽의 반지>가 호평받은 것도, 이런 부분을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평가가 많았다는 이유가 큽니다.

 

 

하지만 이런 건 따로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튀어 보이고 싶어서"라는 의견도 만만찮게 많습니다. 오페라 내용을 이해하지도 않고, 무작정 이태까지 연출된 적 없는 방식으로만 연출하고 보자는 식으로 공연하냐는 식의 반응이지요. 이른바 '현대적 연출' 중에는, 좋게 말하면 급진적이거나 파격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얼토당토않은 연출을 새로운 해석이랍시고 들이대면 그만이냐는 식의 감상을 받기에 딱 좋은 공연도 많아서,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반감이 아예 이른바 현대적 오페라 연출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현대적 오페라 연출을 일명 '레지테아터' 연출이라고 하는데, '유로트래시'라는 이명으로도 불리지요. 유로트래시는 직역하면 유럽식 쓰레기 연출 정도 되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마틴 쿠제이가 연출하고 바이에른 오페라에서 공연한 드보르자크의 <루살카> 공연영상을 보고, 말 그대로 기함한 적이 있습니다. <루살카>는 원래 물의 요정이 등장하는 오페라인데, 연출자가 이 작품을 친딸을 십 년 넘게 감금하고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범죄사건의 무대로 연출했습니다. 원래는 물의 요정이 인간 세계로 나가고 싶어하자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면서 말리는 장면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래, 나가고 싶단 말이지? 내가 보내줄 것 같으냐? 흐흐...." 식의 분위기로 연출되지 않나... 전 미니멀리즘 연출은 좋아하는 편이고, 현대적 연출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데도, 이 공연에는 그야말로 기함했습니다. 일반적인 평으로는 노래와 음악은 좋았다는데, 제 귀에는 음악이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어요. 이전에는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라는 호칭은 좀 심하다고 생각해서 유로트래시라는 말에 반감이 좀 있었는데, 이 연출을 본 뒤에는 유로트래시라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는 납득을 하게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때만 해도 한글 자막이 달린 유일한 <루살카> 영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튜브에 <루살카> 전체 영상도 없을 때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참고 봤는데, 역효과만 잔뜩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루살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작품이 아니라 극단적인 현대 연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먼저 튀어나왔을 정도였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연출을 선호합니다만, 현대적 연출 자체에는 별 반감이 없습니다. 제가 오페라계에 입문한 계기가 엘리야 모신스키가 연출해서 2002년 코벤트가든에서 공연된 <일 트로바토레>를 보고 말 그대로 확 빠져들었기 때문인데, (http://blog.daum.net/ariesia/71 에서 영상을 소개했던 그 공연입니다) 이 공연의 연출이 원작에서는 1500년 즈음으로 설정된 무대를 1900년 즈음으로 바꾼 것이었거든요. 대본을 봐서 내용은 알고 있다지만 한글 자막이 없어서 내용의 반절은 놓치는 상황에서도 곧바로 빠져들었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특히 맨 마지막 장면 연출은 그 어떤 전통적인 연출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원래는 바리톤 배역인 루나 백작이 연적 겸 정적인 테너 배역 남주인공인 만리코가 여차저차해서 사형선고받으니까, 자기가 풀어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사형 집행 선고를 내려버리고, 사형이 집행된 뒤에야 남주인공이 사실 어릴 때 유괴되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자기 동생이라는 걸 알게 되는 대목이지요. 전통적인 연출에서는 백작의 부하들이 만리코를 사형장으로 끌고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만, 모신스키가 연출한 이 공연에서는 백작이 냅다 총을 들어 직접 쏴 버립니다. 그만큼 진실을 알게 된 뒤의 충격도 배가되는 느낌을 주고요. 총이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원작대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장면인데, 전 이 장면이 그 어떤 원작풍 연출보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인상이 이랬기에, 시대 배경을 바꾼 연출 자체에는 반감이 없고, 연출자 경향에 따라서는 은근히 좋아하기도 하는데..... 앞서 말한 마틴 쿠제이의 <루살카>처럼 너무 극단적으로 나가면, 정말 불편하더라고요. 현대적 연출을 나름대로 좋아하는 제가 이 정도였으니, 유로트래시라는 말이 나올 만합니다. 그런데 이 공연을 두고, 그런데 겉으로는 여자를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에는 여자를 속박하고 얽어매려고 하는 본질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표현했다는 식으로 호평하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표준적인 정답은 아마 취향과 개인 생각 등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는 게 자연스러우니, 본인이 선호하는 쪽을 택하면 된다는 것이겠지요. 한 작품을 두고 다양한 연출이 많이 나오는 시대니까요. 다만 별 인기 없는 작품을 드물게 공연하는 영상이라면, 그런 의미에서라도 너무 파격적인 연출은 좀 참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접할 수 있는 <루살카> 영상이 앞서 말한 마틴 쿠제이 연출밖에 없던 시절, 참고 봤다가 기겁했던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고요. 선택의 폭이 없는 상황이라면, 무난하게 나가는 것이 여러 모로 나을 것 같다고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