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문화사

오페레타 <즐거운 과부>와 유럽 상속법 이야기

아리에시아 2023. 5. 9. 21:23

독일어 오페레타인 <즐거운 과부>는 유쾌한 미망인 등 여러 번역이 있으며, 아예 영어식 이름인 메리 위도우로 더 잘 알려져 있을 정도로 제목이 아직 중구난방인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중구난방 제목 번역어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작품 자체는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오페레타가 일단 크게 오페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오페라와 뮤지컬 중간 정도의 느낌으로 오페라에 비해서 경쾌한 분위기가 굉장히 강한데, <즐거운 과부>는 그런 분위기를 특히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여주인공 한나 글라바리는 부유한 은행장과 결혼했는데, 그 남편이 폰테베드로라는 가상국가의 은행에 재산을 맡겼을 때, 은행의 예치금에서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부유하다는 설정입니다. 그 남편이 자녀 없이 죽자, 그 많은 재산은 이제 과부가 된 한나가 재산의 주인의 아내로서 상속받게 됩니다.

이 와중에 폰테베드로에서는 한나가 만약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폰테베드로의 많은 재산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된다면서, 한나가 폰테베드로의 남자와 재혼하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폰테베드로인으로서 마침 파리에 있던 남주인공 다닐로는,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한때 사랑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했던 여자에게 다시 청혼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부유한 과부가 된 한나에게는 수많은 남자들이 몰려들며 청혼합니다.

하지만 막상 다닐로는 한나에게 청혼하지 못합니다. 지금 청혼하면, 한나의 재산을 노리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한나가 죽은 남편의 유언장에 대해 이야기하자, 곧바로 상황이 바뀝니다. 유언장에 따르면, 한나가 재혼하면 한나는 유산 상속권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많던 구혼자가 모두 사라지지요.

그 때 마침내 다닐로는 한나에게 청혼합니다. 한나의 재산이 아니라, 한나를 사랑하기 떄문에 청혼하는 것이라면서요.

한나는 다닐로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그 유언장의 또다른 조항에 대해 알려줍니다.

유언장에 따르면 한나가 재혼하면, 그 많은 재산은 한나가 아니라 한나의 새 남편에게 상속된다는 것입니다.

즉, 다닐로가 한나와 결혼하면 그 많은 재산을 한나와 다닐로 부부는 여전히 물려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재산 없는 여인에게 사랑해서 청혼하자, 보답처럼 수많은 재산이 생기게 된다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빌랴의 노래, 2중창 입술은 침묵하고 등 여러 노래가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지요.

 

https://youtu.be/KWcYApekhXU?si=kIfDpX1GCLrEgGbz

김자경 오페라단에서 2015년 한 시간 정도의 갈라 콘서트로 진행한 공연입니다.

전체 오페라의 절반 정도 내용을 담았으며,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재산을 저런 식으로 물려준다는 반전은, 작품 안에서는 일종의 해피엔딩 반전 장치 정도의 역할만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저런 식의 유산 상속 방법이 유럽에서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남편이 죽으면서 아내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아내가 재혼하면 그 유산이 새 남편에게 상속된다는 식의 유산 상속 말입니다.

 

대답하자면, 이미 존재한 적이 있다에 가깝습니다.

중근세 유럽에서는 아예 영주가 아이 없이 죽을 경우, 과부와 재혼한 남자가 새 영주가 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기도 했지요.

 

https://ariesia.tistory.com/169

 

벨리니의 <텐다의 베아트리체>와 중근세 유럽의 영주 미망인 재혼 제도

빈첸초 벨리니의 1833년작 오페라인 <텐다의 베아트리체>의 배경은 1418년 밀라노로, 실화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현재 밀라노의 영

ariesia.tistory.com

 

그리고 재산의 경우 여자의 재산은 결혼하면 남편이 소유하게 되는 것이 유럽 전통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즐거운 과부>가 처음 공연된 오스트리아 제국은 살리카법이 있던 곳인데, 이 점을 고려하면 초연 관객들에게는 해당 유산상속 설정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졌을 가능성도 높을 겁니다.

살리카법은 남자만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딸의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사위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삼고 딸은 그 부인으로 삼는 식의 방법이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저런 식으로, 남자만 상속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 대신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선대 황제의 사위로서 이어받는 형태를 취해서, 황제 자리를 세습하는 데 성공했지요.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과 그 남자후손은 선대 황제의 사위로서 새 황제가 된 프란츠 1세의 자손으로서, 잡음 없이 황제 자리를 대대로 물려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