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역사의 만남/오페라 속의 문화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와 18세기 사교계 문화

아리에시아 2016. 1. 9. 11:57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의 유명한 대목만 보면, 이 작품은 역사적 고증을 무시하기로 작정하고 만든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 은장미 청혼 장면일 텐데, 신랑 측의 청혼 전령이 신부 측에게 은장미를 건네주며 청혼한다는 대목은 모든 오페라를 통틀어 낭만적이기로 손꼽히는 명장면입니다만, 은장미 청혼 풍습 자체가 작가가 창작해낸 것입니다. http://blog.daum.net/ariesia/3 그리고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왈츠 음악도 상당히 유명하고 인기가 많습니다만, 왈츠는 19세기에 처음 등장한 음악이기에,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중후반에는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장미의 기사>에 등장하는 왈츠 곡 중 한 곡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장미의 기사>는 18세기 중후반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의 사교계 문화가 전체적인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정서에 대폭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페라 줄거리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이 돋보이는 장면의 태반은, 18세기 사교계 문화 풍토를 바탕으로 전개됩니다.

 

 

<장미의 기사>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역 3인방은 원수부인, 로프라노 백작 옥타비안, 옥스 남작의 정혼자인 조피입니다. 어느 날 원수부인에게 별다른 연고도 없던 친척인 옥스 남작이 찾아오는데, 옥스 남작이 원수부인에게 하는 말인즉슨 정혼자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고 싶으니 청혼 전령을 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오페라에서는 신랑 측의 전령이 신부 측에게 은빛 옷을 입고 은장미를 건네면서 청혼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지요. 원수부인은 옥타비안을 추천하고, 옥타비안은 '장미의 기사'로서 조피의 집에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은장미 헌정 장면에서, 조피와 옥타비안은 첫눈에 서로 사랑에 빠집니다. 게다가 옥스 남작은 좋게 표현해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경박한 위인이었고, 조피를 신부로 존중하기는커녕 대놓고 함부로 대합니다. 자신도 돈이 필요해서 돈만 보고 부잣집 딸과 약혼하면서, 오히려 귀족 작위를 가진 자신이 무려 결혼을 하는 은혜를 베풀어주니 감사하게 여기라는 식의 언행으로 일관하지요. 결국 옥타비안은 조피를 위해서 옥스 남작에게 결투 신청까지 하게 되는데, 옥스 남작은 냅다 엄살을 부리더니, 예비신랑 겸 사위 자격으로 옥타비안을 조피의 집에서 내쫓으라고 난리를 피웁니다.

 

조피와 옥타비안은 옥스 남작을 골탕먹이기 위한 계획을 짭니다. 옥타비안이 여장하고 옥스 남작을 사모하는 여성 역할을 맡아 옥스 남작과 함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 그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이지요. 계획은 계획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잘 진행되어서, 옥스 남작은 약혼녀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있는 자리에 경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오자 엉겁결에 자신과 함께 있는 여자가 자기 약혼녀인 조피라고 둘러대고, 하필이면 그 자리에 조피의 아버지까지 나타납니다. 조피의 아버지는 딸의 약혼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여자가 약혼녀라고 둘러댄 것을 보고 분노하여 파혼을 선언하고, 조피와 옥타비안이 맺어지게 됩니다.

 

 

오페라 1막에서 주역 3인방 중 한 명인 원수부인이 잠에서 깨자마자 원수부인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하러 찾아온 사람들이 침실을 방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장미의 기사>에서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가 일명 '이탈리아 가수의 노래'라고 부르는 아리아인데,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이탈리아 가수의 노래라는 별칭처럼, 18세기풍으로 이탈리아어로 작곡된 아리아입니다. 음악 자체는 멋진데, 오페라 내에서는 귀족부인이 깨어난 직후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몰려와서 가뜩이나 산만하고 부산한 분위기에서, 이런 분위기를 더하는 것처럼 연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이탈리아 성악가의 노래'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내 가슴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고' 아리아를 부릅니다. 제임스 러바인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1982년 지휘한 공연의 영상입니다. 영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내 가슴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고' 이탈리아어-한글 번역 대역본입니다. 번역 출처는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이런 풍경은 그 시대 귀족 사회에서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귀족 부인이 아침에 깨어난 직후 몸단장을 하고 있는 동안, 특별히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지요. 18세기 중후반에는 영향력 있는 귀족이라면 무도회나 살롱 등 이런저런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교 행사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영향력 있는 귀족을 만날 수 있는 길은 그 귀족이 집에 있을 때 방문하는 것밖에 없을 때였으며, 그게 가능한 시간대는 잠들기 직전과 잠에서 깬 직후였던 것에서 유래된 관습입니다. 이탈리아 성악가 장면도 오페라 구성으로 보면 뜬금없는데, 실제로 저런 자리에서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어가 모국어인 오스트리아에서, 굳이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시대적 상황에 들어맞습니다. 적어도 오페라 분야에서만큼은 이탈리아어가 표준어였고, 독일어권 작곡가가 독일에서 공연할 때에도 이탈리아어로 작곡하고 공연했으니까요. 마리아 테레지아 재위 후반기에 활동한 모차르트를 예로 들면,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 일종의 민중 공연으로 기획되었던 징슈필을 제외한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작곡되었는데, http://blog.daum.net/ariesia/39 바로 당시의 공연 관습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옥스 남작의 캐릭터성도 18세기 중후반의 문화 풍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옥스 남작은 조피와 약혼하면서, 50넘은 남자가 15살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큰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별의별 생색을 내고 있는데, 18세기 사교계 문화와 정서가 잘 드러납니다. 조피의 아버지인 파니날은 부유한 신흥 명문으로, 나름대로 공을 쌓아 정식으로 작위도 수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단 귀족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다른 귀족과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지요. 이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는 귀천상혼 제도가 있어서, 왕족은 왕족끼리 귀족은 귀족끼리 혼인해야만 그 자녀의 상속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신규 신분을 획득하면, 법적으로는 오래된 명문가와 명목상 작위가 같으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정식 혼인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명문가라는 것을 내세우는 집안에서는 이런 신흥 귀족을 자신들보다 낮게 취급했고, 그래서 옥스 남작은 부유한 집안의 어린 아가씨와 약혼하면서, 자신이 파니날과 딸 조피에게 명문가와 인연을 맺을 기회를 자비롭게 부여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옥스 남작은 1막에서 정식으로 청혼하기 직전에, 결혼 공증인과 대화하면서, 조피와 결혼하면 조피의 재산 중 어느 것을 자기가 소관할 수 있게 되는지 이야기하는데, 이런 식으로 결혼 협상 때 재산과 관련된 사항을 협상하는 것도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옥스 남작이 주장할 때 하는 말처럼, 신부의 재산은 남편이 관리하게 되고, 처분할 권한도 일임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또한 옥스 남작은 결혼하기도 전에 사생아를 낳았고, 시종으로 위장시켜 곁에 데리고 있는데, 이것도 자연스럽다 못해 일상적이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리고 하녀 옷을 입고 여장한 옥타비안을 보자, 로프라노 백작 옥타비안과 무척 닮은 하녀라면서, 옥타비안의 아버지가 하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딸일 거라고 짐작하지요. 그리고 이 짐작을 로프라노 백작 옥타비안에게 전혀 거리낌 없이 말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사생아 딸을 둔 것을 숨길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요. 옥스 남작은 <장미의 기사>의 배경이 되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보다 한 세대 전의 사람으로, 사생아를 낳는 것을 부끄럽기는커녕 남자다운 것이라는 식으로 여기던 풍조 속에서 성장한 세대인데, 이런 시대배경과 문화적 풍조가 반영된 캐릭터상입니다.

 

 

은장미 헌정 바로 다음에 조피와 옥타비안이 대화하는 대목은, 이런 문화사적인 측면이 극대화된 장면입니다. 오페라 줄거리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4분 남짓한 장면 안에 18세기 중후반 귀족 사교계의 면면이 많이 녹아들어 있지요.

 

은장미 헌정 장면 직후의 조피와 옥타비안의 대화 장면의 공연 동영상입니다. 영어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1960년에 카라얀이 지휘한 공연으로, 옥타비안 역에 세나 유리나치, 조피 역에 아넬리제 로텐베르거입니다. 동영상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4분 경에 옥스 남작이 등장하는 장면까지가 제가 언급한 대화 장면입니다.

 

위 대화 장면의 독일어 원어-한국어 번역 대역 대본입니다. 번역은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의 대본 번역을 바탕으로, 2014년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지휘한 잘츠부르크 실황 영상의 한국어 자막의 번역으로 몇 군데 수정했습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이 대목에서는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보면 뜬금없고 이해불명인 대사가 여럿 있습니다. 백작인 옥타비안의 세례명은 옥타비안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할 정도로 깁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옥타비안과 아무런 연고가 없고 이번에 처음 만난 조피는 옥타비안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귀족연감이라는 것에 나와 있어서 알게 되었고 외웠다고 합니다. 공연 동영상의 영어 자막 및 고클래식 대본자료실의 번역에서는 '사촌'이라고 번역된 대목은, 독일어 원어에서는 '몽 쿠쟁', '마 쿠쟁느'라고 되어 있는 부분인데, 이 단어는 독일어가 아닙니다. 프랑스어지요.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뜬금없는데,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처음 만났는데 서로를 사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세례명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오페라에서 옥타비안의 세례명은 '옥타비안 마리아 에렌라이히 보나벤투라 페르난트 히아신스'입니다. 현대 한국에서는 카톨릭 세례명이 이름 하나인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근대 유럽 상류층에서는 세례명이 이름 세 개 이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옥타비안처럼 이름 다섯 개 이상으로 이루어진 세례명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조피는 만난 적도 없던 옥타비안의 신상을 귀족 연감을 읽고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귀족 연감이라는 책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귀족 연감이라는 제목 그대로, 귀족 가문의 내력과 작위 여부, 현재 가문의 구성원 등을 사전처럼 수록한 책입니다. 오페라 내에서 한 상인의 딸인 조피가 귀족연감을 읽었던 것처럼, 귀족이 아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근대 시대에 신흥 귀족 가문이 연달아 등장하고, 한 술 더 떠 정식 귀족이 아닌데도 귀족처럼 보일 법한 이름을 쓰는 경우까지 나오면서, 귀족 연감은 일종의 인명사전 내지 신분 증명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누가 실제로 귀족 작위를 가진 귀족인지 아닌지, 귀족이라면 얼마나 유서깊은 가문인지를 따져보는 용도로 자주 쓰인 것이지요. 이 귀족 연감은 정기적으로 개정판이 출판되었으며, 최신개정판 귀족 연감은 출판시장의 스테디셀러였다고 합니다.

 

조피와 옥타비안은 서로를 몽 쿠쟁, 마 쿠쟁느라고 부르는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사촌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입니다. 옥타비안과 조피가 아무런 연고 없이 이제 처음 만난 사이이며, 대화하는 시점에서 그나마 생긴 관계가 옥타비안의 사촌과 조피가 약혼했다는 것 정도인데, 서로를 사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근대 유럽 문화권에서는 친척 호칭 관계가 명확하고 세세한 한국 문화권에서는 생소한 풍조가 있었으니, 다른 사람과 대화할 떄 친밀한 2인칭으로 '사촌'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유럽권에서는 4촌 이상의 친척은 굳이 촌수를 따지지 않고 뭉뚱그려서 '사촌'이라는 호칭으로 통칭하며, 나아가 사촌이라는 표현 자체가 그냥 친근한 사이에서 사용하는 호칭으로도 자주 쓰이는 것입니다.

 

사촌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프랑스어입니다. 독일어에도 사촌을 뜻하는 단어는 있기에, 마땅한 독일어 단어가 없어서 외국어를 쓴 것일 리는 없습니다. 옥타비안이나 조피가 프랑스계라는 설정도 없고요. 정황 묘사 등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상류계층에서는 프랑스어를 사교언어로 사용하던 관습을 반영한 것일 듯합니다. 18세기 러시아는 프랑스어를 숭배 수준으로 광적으로 떠받들고 자국어를 천대한 것으로 유명한데, 러시아보다는 정도가 덜했지만 이런 풍조는 당시 유럽에서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18세기 러시아처럼 자국어에 서투른 것을 "나는 프랑스어로만 대화하며, 프랑스어를 못하는 사람과는 대화할 일이 없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여기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자국어로 대화하는 것은 어딘가 품위 없고 무게감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프랑스어를 하는 것을 교양 있고 격조 높은 귀족의 소양처럼 여기는 풍조는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와 대립하는 국가들도 이런 풍조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일례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던 프로이센에서도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를 자주 썼으며, 심지어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궁전을 건설하면며 "상수시"라는 프랑스어로 궁전 이름을 지었을 정도였습니다. <장미의 기사> 배경시대 이후인 19세기 초반의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나폴레옹의 장군이었던 베르나도트가 이런저런 사건을 거쳐 스웨덴 국왕의 양자가 되고 훗날 스웨덴 국왕이 되었는데,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어를 전혀 몰랐지만 스웨덴 고위귀족과 관료들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기에 국정 운영에는 문제가 없었던 사례도 있습니다.

 

 

4분 가량의 짧은 대화에도 이렇게 문화사적으로 풍부한 요소를 집어넣은 것을 보면, 이 오페라의 작가가 18세기 유럽에 대해 "무지"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장미 헌정 관습처럼 아예 없는 것을 지어낸 것은 그렇다쳐도, 19세기 음악인 왈츠를 18세기 배경의 작품에 삽입한 것 등의 시대착오적인 고증오류 상황이 여럿 나오는 것은, 수많은 오페라에서 종종 나타나는 고증오류 상황과는 달리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일단 왈츠에 대해서는 왈츠 특유의 쾌활한 분위기가 <장미의 기사>의 전체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 정설이며, 이른바 고증오류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대목도 이처럼 오페라의 분위기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설정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실제로 그런 시대착오적인 대목은 오페라에서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