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도 블로그에서 언급한 조세핀 테이의 추리소설 <시간의 딸> 번역본은 한국인 정서에서 좀 의아하게 느껴질 부분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절대악인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1452-1485)는 잉글랜드 요크 왕조의 3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입니다. 헨리 7세 바로 전의 왕이라고 하는 쪽이 더 빠르겠지요. 15세기 말 잉글랜드에서는 30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나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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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7세가 랭커스터 가문의 먼 친척이라지만, 직계 조상이 서출이었다는 식의 문장입니다. 그리고 그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나오지요. 여기서는 '서출'이 감히 왕위를 욕심내는 것이 경악할 만한 일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한국 정서로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서자여도 적자가 없다면 얼마든지 계승권이 있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후궁이나 첩 제도가 있고, 후궁이나 첩이 낳은 자녀는 서출로서 친아버지의 핏줄로 인정받고, 원칙적으로 계승권도 있는 동양권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유럽권에서는 후궁이나 첩 개념이 없습니다. 본처의 아들딸이 아니면 무조건 사생아이고, 법적으로 그 친아버지와 남남입니다. 사생아는 친아버지 쪽에서 자기 핏줄이랍시고 나름대로 재산을 좀 떼줄 수는 있지만, 그게 사실상 전부입니다.
국왕의 사생아라도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적당한 귀족 작위와 많은 재산을 하사받을 수는 있지만, 왕위계승권은 없습니다.
중세 초기, 일부다처제가 있던 시절 즈음에만 해도 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가 낳은 아이가 후계자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만, 일부일처제가 자리잡고 사생아 개념이 확립되면서 사실상 사라집니다.
이베리아 반도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정도가 예외인데, 거기서도 사생아가 계승권자가 된 사례는 매우 드물며, 그나마도 일단은 교황의 특별허가 등으로 적출 자격을 인정받는 절차를 거쳐서야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서자 개념이 확고한 곳이었습니다. 남자가 혼인기간 동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얻어도, 일단 호적에 올리기만 하면 버젓한 아들로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지요. 드라마에서 이른바 재벌의 서자 캐릭터가 자주 나오는 것도, 적출보다 능력 등에 대한 평이 좋으면 후계자 후보로 여겨지는 것도 서자 제도가 있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간혹 동양은 서자, 서양은 사생아라고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좀 다릅니다.
서양에서 서자 제도가 없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동양에 사생아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생아는 서양 개념이 아니라, 동양에서는 아버지가 아이의 어머니를 첩으로 인정하면 어머니의 신분이 아무리 미천해도 서얼로 인정은 받을 수 있었던 것에 가깝습니다.
고려의 8대 국왕인 현종이 '사생아' 출신 국왕으로 표기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요. 왕족 남녀 두 명, 그것도 한 명은 옛 왕비라서 도저히 첩으로 삼을 수 없는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현종은 서출 자격조차 변변히 얻을 수 없었습니다. 현종이 나중에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현종 이외에 왕실 핏줄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국왕이 된 현종이 고려 역사상 손꼽히는 현군이 되고, 귀주대첩 승리를 이끈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서자와 사생아는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양권 책에서 사생아라고 쓰인 부분을 한국 번역본 등에서 서자로 번역할 때가 종종 있는데, 저 둘은 구별하자고 말하고 싶어지고는 합니다. 특히 후계분쟁이나 계승권 문제가 중요할 때는요.
서자는 계승권이 있을 수 있지만 사생아는 계승권이 없습니다. 이걸 혼용하면, 내용이 엉키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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