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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설정과 짜임새 이야기-로베르 드 보롱과 성배

아리에시아 2020. 8. 8. 12:31

로베르 드 보롱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국내에 번역출간된 보롱의 책은 일단 나름대로 공동저술이기는 한데, 다른 작가 쪽의 비중이 더 높은 <메를랭과 아서> 하나밖에 없지요.

 

하지만 로베르 드 보롱이 만들어낸 설정 하나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바로 아서왕 전설의 성배입니다.

어쩌면 성배 전설이 아서왕 문학서 시작되었다는 것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아서왕 전설과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작품에서도 성배 설정을 차용하는 일이 워낙 많은데다, 독이 든 성배라는 표현 등 숫제 관용구처럼 쓰이는 일도 종종 있으니까요.

 

중세 시절, 아서왕 전설은 그야말로 이야기의 화수분같은 소재였습니다.

http://blog.daum.net/ariesia/60

중세 유럽에서는 오늘날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배격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작가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허황된 것이며, 나아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다듬는 것이야말로 이야기꾼의 본분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지요.

여기에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어서 책을 대량생산할 수 없으며 일일이 필사본으로 제작해야 한다는 점까지 겹치자, 중세 유럽에서는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자 이미 있는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인물이나 사건 등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아서왕 전설이 바로 그 과정을 거쳐서 인기를 끌고 유명해졌으며, 많은 작품이 쓰였지요.

 

이 때 '그라알 이야기'라는 작품이 나옵니다. 아서왕 전설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마지막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저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되었지요. <그라알 이야기>의 내용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페르스발(영어로는 퍼시발, 독일어로는 파르치팔)이라는 기사가 그라알이라는 귀중한 보물을 찾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크레티앵 드 트루아는 저 작품을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그라알이 무엇인지도 작중에서 언급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로베르 드 보롱이라는 사람이 그라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유물인 성배이며, 아서왕의 기사들이 그 보물을 찾는다는 설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성배는 오늘날에는 수많은 작품에서 언급되며, 성배라는 이름이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막상 로베르 드 보롱이라는 이름은 잊혔지요. 창시자로서의 인지도조차 없어질 정도로요.

 

그도 그럴 것이, 로베르 드 보롱이 직접 쓴 작품은 중세 문학 기준으로도 재미가 없다는 악평이 자자합니다. 저는 번역판만 읽는 사람이라서 <메를랭과 아서>만 읽어보았는데, 고전을 읽으면서 내용은 이해하겠는데 페이지가 도저히 안 넘어가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되었더랬습니다. 단테의 <신곡> 천국편보다 페이지가 더 안 넘어가더군요.

 

개인적으로 저 작품의 의의란, 귀네비어 왕비가 란슬롯 외에 다른 기사와 사랑에 빠지면 란슬롯이 나올 때보다 훨씬 재미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것밖에 없었습니다.

란슬롯이 아니라면, 상대가 누구냐고요? 아서왕의 숙적같은 누이의 아들이자, 반역자로 이름을 남긴 모드레드입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만 했는데도, 란슬롯 버전보다 김이 빠진다는 것이 확 느껴지는 것 같네요.

따지자면 란슬롯이 나중에 아서왕 전설에 들어온 캐릭터이고, 아서왕 전설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모드레드가 귀네비어에게 눈독을 들이는 전개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요.

심지어 저 작품은 그나마 다른 작가와 같이 쓴 것이라, 보롱의 작품 중에서는 그나마 재미가 있는 축에 속한다는 평까지 있는 판이랍니다.

 

멋진 설정은 만들어냈지만, 막상 본인은 그 잠재력은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오죽하면 보롱이 성배를 직접 처음으로 언급한 작품은, 성배 설화 등을 언급할 때 원문 번역으로 인용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적도 없어요.

도대체 얼마나 재미가 없으면, 원전 인용조차 변변히 되지 않는 거냐는 말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더군요. 이쯤 되면 보롱이 성배 설정을 만들었다는 건 전해지는 것이 용하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흥미로운 설정을 만드는 것과, 그 설정으로 흥미롭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 사례였지요. 그리고 자신이 직접 멋진 설정을 만들지는 못해도, 흥미로운 설정을 접하면 거기에서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창작자도 존재한다는 것도요. 

 

원조의 아류작 중 아류작이 재미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더 호응이 좋아서 원조보다 오히려 더 큰 인기를 끄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는데, 그 현상이 특히 잘 드러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