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소설 스칼렛 핌퍼넬 시리즈와 구석의 노인 시리즈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기발한 설정은 잘 만들어내는데, 막상 활용은 제대로 못 하는 작가.
제가 20세기 소설가인 에마 오르치의 작품을 읽었을 때 느낀 감정입니다.
에마 오르치의 대표작은 <스칼렛 핌퍼넬>과 <구석의 노인>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각각 오늘날까지 인기있는 설정 하나를 통째로 만들어냈지요.
<스칼렛 핌퍼넬>은 정체를 감추고 영웅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복면 영웅의 시초 격인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구석의 노인>은 사건 현장에 직접 나가지 않고, 사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만으로도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안락의자 탐정의 원조 격인 캐릭터지요.
수십 년 넘도록 창작물에서 되풀이되는 인기 있고 창의적인 설정을 두 개나 만들어내다니! 이렇게만 정리하면, 대중문화 분야에서 개척자 겸 원로 대우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르치는 저 두 인기 설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원조 작가로서 종종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그게 끝입니다. 작품 자체는 거의 잊혔습니다. 그리고 한글 번역판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저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칼렛 핌퍼넬>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작중에서 프랑스 혁명 시기,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 상당수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 때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이름을 쓰는 영웅이 나타나서, 프랑스의 귀족들을 탈출시키고 구출하는 영웅 스토리입니다.
앞에서 스칼렛 핌퍼넬이 복면 영웅의 시초 격인 캐릭터라고 말씀드렸지요. 스칼렛 핌퍼넬의 정체는 평소에는 얼뜨기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맹하고 의욕 없어 보이는 영국 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맹한 이미지 덕에 다른 사람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활용합니다.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은 20세기에 아동문학전집 등에서 빨강 별꽃이라는 제목 등으로 자주 번역되었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였고, 다른 시리즈는 그나마 거의 언급되지도 않습니다. 작품 자체도, 캐릭터도 잊혀버리다시피 했어요. 다른 작품들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2018년부터입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다른 시리즈를 보고 잊혀질 만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칼렛 핌퍼넬이 프랑스 혁명에서 프랑스 귀족들을 구출하는 영국 귀족이라는 점이 문제일까요? 프랑스 혁명을 사람을 잡아 죽이는 데 전념하는 것처럼 묘사한 게 문제일까요?
아니요.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귀족이 고결한 희생자같은 캐릭터로 등장하고 프랑스혁명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면,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사상적으로 인종차별을 당연한 것처럼 묘사한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같은 취급이나 받고 있었겠지요.
리펜슈탈이 <의지의 승리>에서 인종차별 등의 나치 이념을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치의 행사를 장엄하고 웅장하게 느껴지도록 영상에 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매장당하다시피 했던 것처럼요.
아동용 역사책 등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긍정적으로만 그리는 경우가 많으니, 아동용 작품으로는 좀 곤란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 기준대로라면, 청소년층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감상해도 되는 작품이 되겠지요.
스칼렛 핌퍼넬 시리즈의 진짜 문제는, 패턴이 너무 정형화되고 뻔하다는 겁니다. 스칼렛 핌퍼넬이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착각하게 해서 추적자들을 따돌리는 내용이 사실상 전부예요.
첫번째 작품인 <스칼렛 핌퍼넬>은 스칼렛 핌퍼넬과 아내가 서로 오해하다가 그 오해를 풀고 재결합하는 로맨스 스토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졌기에, 계략 부분이 허술하게 묘사되어도 대충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도 계략이란 변장하거나 교묘하게 바꿔치기했다는 내용밖에 없는 수준이예요. 도움 받는 인물의 이름만 바뀝니다.
이쯤 되면 스칼렛 핌퍼넬 시리즈의 악역 쇼블랭은 프랑스 혁명 당시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인 쇼블랭 후작의 이름에서 따 왔으며, 그러면서 영국에서 신사적인 귀족 대우를 받던 실제 쇼블랭 후작에 비춰보면 저열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불량배같은 캐릭터로 묘사되었다는 건 오히려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재미만 있었으면, 그 정도는 실존인물이 아닌 셈 치고 넘어가게 되었을걸요. 지금 이 순간에도 프랑스의 위인이나 다름없는 리슐리외를 웬 음모꾼처럼 묘사한 <삼총사> 각색본이 넘쳐난다는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약과일 겁니다.
http://blog.daum.net/ariesia/124
아동용 개작본, 축약본, 완역본 이야기
소년소녀문학전집 등으로 수십 편의 문학작품을 묶은 시리즈는 정말 많지만, 대부분은 아동용이나 청소년용으로 개작되고 축약된 버전이었습니다. 이런 책들이 완역본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
blog.daum.net
그리고 이 단점은 구석의 노인 시리즈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구석의 노인 시리즈에서는 간단하면서 비슷한 트릭을 여러 번 써먹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범인이 사람을 죽인 뒤, 희생자를 자기처럼 변장시키는 식의 에피소드가 절반쯤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니 전개도 뻔합니다.
A라는 사람이 살해당했는데, B라는 사람이 살인범으로 의심받는다
->경찰이 B를 아무리 수색해도 보이지 않는다. B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구석의 노인이 B는 살해당한 사람이라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A가 B를 죽이고 도망쳤다고 추리한다.
저는 생각하기도 전에 빨리 글을 읽기 때문에,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범인이나 사건의 진상을 알아맞힌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결말을 읽거든요. 하지만 구석의 노인 시리즈만은 예외였습니다. 맞히지 못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어요. 바꿔치기 말고는 트릭이 없냐는 말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지요.
간접적으로 접한 정보만으로 추리하는 안락의자 탐정 캐릭터를 처음 만들어냈으면서, 막상 창의성은 설정 발상에서 끝나버린 느낌마저 줍니다. 오늘날 변변한 번역본도 없을 정도로 잊힐 만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요.
여담으로 오르치는 최초의 여성 탐정 캐릭터를 만들어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스코틀랜드 야드의 레이디 몰리 시리즈지요. 요즘에야 남자캐릭터가 주로 등장하던 배역을 여자 캐릭터로 바꾸기만 하는 것은 식상하다는 말을 듣지만, 20세기 초에 그 발상은 대단한 혁신이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는 여성 탐정이 사건은 해결하는데, 그냥 자기가 이러저러한 추측을 했는데 그게 맞아떨어졌다는 식의 내용만 전개됩니다.....
대중문화에서 두고두고 인기를 끄는 창의적인 설정을 두 개나 만들어내고, 당시 기준에서 혁신적인 설정도 또 만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잊힐 수 있는 게 신기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작품을 직접 읽어보면 금세 이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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