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블로그 외 주제

교육적 목적으로 쓰이고 고전으로 남은 작품들

아리에시아 2019. 7. 5. 20:29

특정 사상 등 특정한 목적을 위해 쓰인 작품들은 오래 가지 않아 빛을 잃고 잊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수많은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처음 선보이면서부터 빛을 받지 못하거나, 빛을 받는 데 성공하더라도 오래 못 가서 외면받기 시작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난히 특정 목적을 위해 창작된 작품만 예외일 이유는 딱히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경향을 감안하더라도, 특정 목적을 위해 쓰인 작품에서는 그런 빈도가 유난히 높은 느낌입니다.


이것은 특정 목적을 위해 쓰였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한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기인하는 측면이 큽니다. 그런 창작 배경 자체가 작품의 내용, 결말, 묘사 등을 제약하며 뻣뻣하게 만드는 경우가 굉장히 많으니까요.


하지만 아주 드문 사례도 있습니다. 오페라를 예로 들면, 베르디의 <아이다>는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해서 이집트를 멋지게 묘사한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따지자면 오페라라는 장르 자체가 저런 의도에서 출발하고 발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권력자의 결혼식이나 생일 등을 축하하기 위해서, 주인공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도배된 작품을 제작하고 공연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거든요. 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손꼽히는 베르디는 의뢰자의 주문을 모두 충족시키면서. 의뢰받은 작품을 오페라 역사상 손꼽히는 인기작으로 만들었습니다. http://blog.daum.net/ariesia/26


특히 교육적 목적을 위해서 쓰였지만, 고전으로 살아남아서 한 세기를 훌쩍 넘기도록 널리 읽히는 작품도 여럿 있지요. 오늘은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해저 2만 리> 등, 쥘 베른의 공상과학소설


열림원에서 김석희 번역으로 출간된 쥘 베른 거작선에는 작품 해설이 따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설을 읽고 굉장히 이채로운 느낌을 받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해저 2만리> 등 쥘 베른의 공상과학 소설 상당수가 청소년 대상 교양잡지에서, 교육적인 목적으로 의뢰받고 연재되어 쓰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저 2만 리>, <달 나라 탐험> 등의 공상과학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15소년 표류기> 등 일단 SF식 설정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 모험 계열 소설에서도 과학적 지식 및 탐구정신 등을 강조하는 묘사가 많은데, 바로 이런 창작동기에서 비롯한 격입니다. 저것을 알고 다시 읽으니 확실히 과학 관련 지식을 높은 비중으로 다루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묘사가 자주 나오는 부분이 눈에 띄더군요. 하지만 어렵다거나 지루하다거나 설명이 너무 많다거나 하는 식의 생각은 딱히 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생생하고 그럴싸한 묘사처럼 받아들여지고는 합니다. 그것이 바로 100년을 훌쩍 넘도록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고전으로 남은, 쥘 베른 작품의 생명력이자 장점이겠지요.



셀마 라게를뢰프의 <닐스의 신비한 여행>


<닐스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훨씬 더 유명하지만, 완역본은 <닐스의 신비한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주아주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신비한 요정의 마법 때문에 엄지공주처럼 작아진 악동 꼬마 닐스가 거위 모르텐의 등에 타고 곳곳을 여행하며 이런저런 일을 겪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에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거쳐서 다시 몸이 커지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작가 라게를뢰프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를 탄생시킨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닐스의 신비한 여행>에는 스웨덴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전설이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스웨덴 정부 측에서, 라게를뢰프에게 스웨덴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재로 한 작품을 직접 의뢰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알고 읽어도 딱히 거슬린다는 느낌은 없지요. 광고가 아니라,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 묘사가 아름답게만 느껴지니까요.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아이>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아이>의 줄거리 자체는 단순합니다. 버려진 아이가 멘토 격의 노인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지만, 알고 보니 부유한 대귀족의 아들이었기에 가족을 찾아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해피 엔딩으로 끝맺습니다.


작가 엑토르 말로는 이 작품을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을 널리 알리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애국적인 정서가 흥할 때가 많으니, 이 계기 자체는 특이할 것까지는 없겠지요. 그리고 그 취지에 걸맞게끔 프랑스 곳곳의 다양한 풍경이 등장할 때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유려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되는 대목이 높은 비중으로 나옵니다.


여담으로, 막상 <집 없는 아이>의 세부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좀 의아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집 없는 아이> 완역본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당한 일을 당한다거나, 기댈 데 없는 처량한 신세의 사람들이 갖가지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 레미가 졸지에 탄광에 갇힐 때의 전개와 묘사는, 이 작품이 아동용으로 널리 읽힌다는 점을 고려하면 탄광 사고 및 파업을 다룬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런 일이 일어나면서도 결국에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강조한 작품이었으니, 딱히 이율배반적이거나 모순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더랬지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애국적인 취지에서 쓰였다고 무조건 찬양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