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가로서의 한스 홀바인의 업적과 궤적은 유럽 회화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힙니다. 특히 영국 초상화 분야에서 한스 홀바인이 남긴 업적은 그야말로 지대한데, 한스 홀바인의 활동이 중단된 이후 50년이 넘도록 한스 홀바인과 비슷한 수준의 그림이라도 그려낸 화가가 영국에서는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스 홀바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라면 단연 <대사들>일 것입니다. 1533년작품으로, 정연한 분위기와 세밀한 묘사가 감탄스럽습니다.
이 작품은 그림 이외의 분야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우선, 16세기 초반 영국 및 유럽의 문물을 면밀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림의 묘사 자체도 정밀하고 사실적이지만, 배경에 등장한 소품들은 하나같이 이 그림을 미시사의 표상 쯤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당대 사회를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선 붉은 이슬람식 카펫이 눈에 띕니다. 장식장의 윗부분을 덮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와 교역해서 이슬람 예술품을 들여올 수 있었던 시대를 반영한다고 흔히 해석됩니다. 장식장 안의 소품들도 앞서 말했듯이, 당대 사회상 및 여러 분야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이지요. 르네상스 시기에 유행했던 악기인 류트, 둥근 지구 모형 속에 예전 시대에 비해 더한층 정확해진 지도를 그려넣은 지구의, 해시계 등 갖가지 과학 도구,당대 논란이 되었던 서적까지.
이 작품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그림 아랫부분에 흰 막대기 같은 것이 그려진 부분일 것입니다. 찌그러진 듯한 이 흰색 덩어리를 옆에서 늘어뜨린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해골 그림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해골의 왜상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지요.
그림 아랫부분의 흰 덩어리 같은 것이 잘 보이는 각도로 보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이 해골은 무슨 뜻이며, 화가 홀바인은 어째서 이런 그림을 넣었으며, 왜 저렇게 일그러뜨린 형태로 그렸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입니다. 화가 홀바인이 직접 남긴 증언이나 관련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그저 그럴듯한 추측만 분분할 뿐이지요.
그리고 이 수수께끼의 해골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대사들>도 덩달아 유명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역사 속에서 일회적이고 무의미한 해프닝쯤으로 여겨지며 완전히 잊혔을 사건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게 만듭니다.
잉글랜드의 튜더 왕조의 두번째 국왕 국왕 헨리 8세는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에드워드 6세, 블러디 메리라는 멸칭 내지 별칭으로 유명한 메리 1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왕비를 여섯 명 둔 것으로 유명합니다.
첫째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혼인무효를 선언하고 내쫓고, 둘째 왕비 앤 불린은 처형하고, 셋째 왕비 제인 시모어는 아이를 낳다 죽었으며, 넷째 왕비 클레페의 안나는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합의이혼하고, 다섯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는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여섯번째 왕비 캐서린 파와 결혼했지요.
이 중 처형당한 두 왕비가 처형된 사유도 미심쩍어서, 더욱 입방아를 찧게 됩니다. 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는 모두 간통 혐의로 사형당했는데, 앤 불린은 앤 불린의 정적조차 간통 혐의는 누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증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캐서린 하워드는 왕비가 되기 전에 다른 남자와 깊은 관계였던 것이 발각된 후, 현대 재판 기준으로 보면 시종 중에 한 명을 좀 친하게 대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연애편지라는 것이 증거품으로 제출되기는 했는데, 캐서린 하워드는 자기 이름도 겨우 서명했을 정도의 문맹이라는 증언이 있어서 더욱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일은 단연 둘째 왕비 앤 불린을 들였을 때의 일입니다. 아라곤의 국왕과 카스티야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카탈리나, 일명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지만 딸 한 명만 낳고 폐경이 되자,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내서 혼인무효를 시도합니다. 카톨릭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교황이 특별하게 허가하면, 구색을 갖추어 헤어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이혼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자 카톨릭교 대신 성공회로 국교를 바꾸어서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를 기어코 쫓아내고 말지요. 종교를 바꾸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성공회는 종교의 수장이 교황이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이라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카톨릭과 교리의 차이점은 거의 없었습니다. 성공회가 개신교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은 훨씬 뒤의 일입니다.
그리고 저 과정에서 헨리 8세는 카톨릭교의 수많은 성물과 보물, 토지와 성당 건물 등을 모두 몰수했습니다. 카톨릭교에서는 귀중한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든 보물을 경배의 뜻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헨리 8세는 그 봉헌물들을 금은보석으로만 여겨서 몰수한 뒤 모두 녹이거나 재활용했습니다. 카톨릭교의 토지와 건물을 빼앗은 것도,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대충 팔아버리는 바람에 헨리 8세가 막상 손에 넣은 것은 그렇게 많지도 않았습니다.
한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화입니다.
1533년, 프랑스에서는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라는 두 대사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출발합니다. 이 두 대사는 헨리 8세를 종교적으로 설득하는 사명을 가지고 사절단으로 파견된 것이었습니다. 카톨릭교를 계속 국교로 유지하고, 또한 아라곤의 카탈리나를 계속 왕비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었지요.
그 뒤의 역사에 대해 모두가 알다시피, 저 사절단의 목적은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댕트빌과 셀브라는 이름도 역사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한스 홀바인이 이 두 대사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두 대사의 이름과 이 두 명이 영국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적이 있다는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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