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예술/역사를 상기시킨 예술

뒤마의 <삼총사>와 위그노 반란- 라 로셸 공방전

아리에시아 2016. 7. 2. 11:54

뒤마의 <삼총사>는 활극 계열 작품 중에, 아마도 제일 대중적인 작품일 겁니다. 아예 '삼총사'라는 제목이 친한 친구 세 명이 어울려 다닐 때를 일컫는 별칭처럼 장착하기까지 했지요. 어린이용, 청소년용으로 개작된 세계명작 시리즈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을 만큼 유명하고 인기 많은 작품입니다. 주인공 달타냥을 비롯해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가 같이 어울려 다닌다는 이미지는 굉장히 유명하며, <삼총사>를 읽어본 적 없는 사람도 저런 이미지를 접한 적은 있을 겁니다.


어린이용으로 개작된 <삼총사>는 대강 이런 이야기입니다. 총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무작정 상경한 주인공 달타냥은 이런저런 인연으로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의 세 총사와 어울려 다니며, 뛰어난 검술 솜씨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합니다. 총사들은 철저하게 국왕에 충성하며, 왕비를 대놓고 견제하며 국왕 세력도 은근슬쩍 약화시킬 계획을 꾸미는 추기경 리슐리외와는 대립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개작본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되찾아 오는 계획이 하이라이트로 등장합니다. 왕비가 영국의 재상인 버킹검 공작에게 국왕이 선물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신의의 증표 운운하며 선물로 주는데, 리슐리외가 그것을 알고 국왕이 왕비에게 그 목걸이를 걸고 연회에 참석하라는 명을 내리게 유도합니다. 국왕의 선물이 사라졌다면 왕비의 입장은 엄청나게 곤란해질 테고, 달타냥 및 삼총사는 왕비의 밀명을 받고 영국으로 은밀히 출발합니다. 그리고 버킹검 공작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리슐리외가 버킹검 공작 주변사람을 매수해 다이아몬드 두 개를 빼놓았던 것을 보석 세공인을 동원해 똑같이 생긴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내 대체하게 한 후, 아슬아슬하게 연회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리슐리외는 연회에서 미리 빼돌렸던 다이아몬드 두 개를 국왕에게 바치며 왕비의 목걸이에서 유실된 부분인 것처럼 말하지만, 왕비의 목걸이는 겉으로는 온전했기에, 리슐리외의 '왕비 몰락 음모'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작본의 스토리만 접한 상태에서 완역본 <삼총사>를 읽으면, 엄청나게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삼총사 일행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며 이것저것 사건해결을 시도하는 모습이, 오늘날 관점에서는 무력한 서민 계층에게 무력을 갖춘 세력이 행패부리는 수준의 월권행위로 비치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완역본에서 리슐리외는 총사 일행과 정치적 입장이 다를 뿐, 오히려 삼총사 일행보다 훨씬 의연하고 흔들림 없는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오히려 왕비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비롯해 이런저런 사건을 일으켜서, 왕비의 편을 드는 총사 일행을 곤란하게 만드는 역할로 등장하고요. 무엇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완역본에서는 좀 요란했던 사건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역본에서 하이라이트로 등장하는 대목은, '라 로셸 공방전'입니다. 대부분의 개작본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사건이지요.



16세기 말, 프랑스는 카톨릭 세력 및 신교 세력으로 나뉘어 극심한 내전에 휩싸였습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 위그노 전쟁이라 하며, 프랑스는 수십 년의 내전 기간 동안 초토화되었습니다. 1572년 카톨릭 세력이 신교 세력을 대학살했던 사건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바로 이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프랑스 국왕의 남자 후계자였던 신교도 나바르의 앙리와, 프랑스 국왕의 여동생으로서 카톨릭교도였던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공주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수많은 신교도들을 카톨릭 교도들이 대거 학살했던 사건입니다. 조직적으로 신교도를 학살하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카톨릭 왕실 측에서 신교도 정적 한두 명이나 최측근만을 제거하려고 꾸민 일이 주동자들도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번졌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실제 원인이 어느 쪽이었던 간에, 수많은 신교도가 결혼식을 축하하러 왔다가 학살당했다는 것과, 이 사건이 프랑스 종교 내전을 본격적으로 격화시켰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그린 당대 그림입니다.



프랑스 종교 내전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나고도 사반세기가 지난 뒤인 1598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종결됩니다. 프랑스 국왕 앙리 3세가 죽은 후 법적인 후계자였던 신교도 나바르의 앙리가 프랑스의 왕위를 물려받았고,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를 다스리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동시에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제한적이나마 위그노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입니다. 신교도 위그노는 이제 카톨릭교도에 비해 여러 부분에서 많은 제약을 받고 불평등한 처우를 감수해야 했지만, 적어도 신교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탄압받고 목숨을 잃을 위험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낭트 칙령은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기보다 미봉책에 가까웠으나, 위그노와 카톨릭 양쪽을 그런 대로 만족시키는 방안이었습니다. 하지만 낭트 칙령도 부당하다고 여긴 위그노 세력이 여전히 존재했고, 1618년 독일 땅에서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이런 움직임에 본격적으로 불붙게 됩니다. 그리고 1620년 위그노 세력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고, 이 봉기는 봉기 다음해 소강되는 듯했다가 이내 재발발하여 1629년까지 이어집니다. 위그노 반란이라 불리게 되는 이 봉기는 라 로셸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삼총사> 완역본 후반부에서 하이라이트로 등장하는 바로 그 사건의 장소인 것입니다. 삼총사 일행은 라 로셸 지역에서 일어난 공방전에서 국왕 세력에 합세해 엄청난 무용을 발휘하며, 라 로셸 공방전에서 국왕 측이 승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특히 적측의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홀로 깃발을 흔들며 승리를 이끌고, 승리한 후 국왕이 그 깃발에 세 개의 총알 구멍이 난 것을 용맹의 증표처럼 치하하며, 그 구멍에 프랑스 왕실을 뜻하는 백합을 수놓으라는 명예를 내리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1627년 그려진 라 로셸 부근의 지도 및 라 로셸 공방전의 모습입니다.



라 로셸 공방전은 삼총사를 원작으로 한 개작본이나 파생작품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종교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라 로셸을 함락하려 했던 프랑스 측 지도자가 바로 리슐리외 추기경이기 때문이었지요. 카톨릭 재상이 신교도 세력을 무력진압하려는 모양새이니, 지면의 한계 등으로 복잡한 상황설명을 빼고 간단하게 정리하려면, 종교 탄압처럼 묘사하려는 쪽이 여러 모로 손쉬운 해결책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그노 봉기를 일으킨 신교도 세력의 상황은 몰라도, 이 봉기를 진압하려 한 리슐리외 추기경 측은 이 문제에 종교를 결부시키기도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리슐리외는 30년 전쟁 등에서도 프랑스 측의 이해관계에 따라 카톨릭 국가와 척을 지거나 신교도 국가를 적극 지원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고, 라 로셸에서 봉기를 일으킨 세력은 신교도이기 이전에 반란 세력으로 간주했습니다. 


라 로셸 공방전은 <삼총사> 원작에서 묘사된 것처럼, 프랑스 국왕 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프랑스 왕권의 주축인 카톨릭 세력은 위그노 반란 및 라 로셸 공방전 이전에 비해 훨씬 가혹한 조건을 신교도에게 밀어붙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신교도는 이전보다 더 탄압받는 셈이 되었고, 신교도를 강제적으로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사건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많은 위그노가 이후 프랑스를 떠났고, 이들은 네덜란드 등에 정착하게 됩니다.



위그노 반란이라 기록된 이 사건과, 라 로셸 공방전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는 어떤 의미로든 위그노 세력이 점차 소멸하고 본격적으로 카톨릭 일변도의 국가가 되기 시작했으며, 위그노 반란에서 프랑스 국왕 측이 승리한 것이 프랑스 특유의 절대왕권 시스템이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건 자체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프랑스 종교 내전 및 위그노 전쟁은 낭트 칙령으로 종결되었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며, 1620년-1629년의 위그노 반란 및 라 로셸 공방전은 기껏해야 후속담처럼 언급되는 정도이며,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사건 자체의 의의나 진행상황은지방 봉기를 국왕 세력이 진압한 것 정도에 지나지 않고요. 루이 13세나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해 연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굳이 주목할 이유도 없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뒤마는 라 로셀 공방전을 작품에서 중요한 소재로 삼았고, 17세기 초반 프랑스 정치사 및 종교 내전 등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라 로셸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라 로셸 공방전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뒤마의 <삼총사>를 읽고 처음 접한 경우가 절대다수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