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레핀은 '러시아 민중문화'의 대명사와도 같은 화가입니다. 레핀은 러시아 민중문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으며, 러시아의 전설이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그릴 때에도 민중에게 널리 퍼진 이미지를 적극 채용해 묘사하고는 했습니다.
1873년 레핀은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은 레핀이 여행 중에 직접 목격한 광경을 토대로 그린 작품입니다.
레핀이 이 그림을 그리던 19세기 후반에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육지에 인접한 물길에서 배를 이동시킬 때, 사람들의 배에 끈을 묶어 배를 끌듯이 운반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런 이동방법이 처음 나타난 것은 17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그 후 수백년동안 성행했지요.
그리고 이 방법은 증기선이 발명된 뒤에도 한동안 애용되었습니다. 레핀이 그린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의 오른쪽 배경 부분에는 연기 같은 것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연기는 다름아닌 증기선이 내뿜는 증기였습니다. 증기선이 운항되던 시대에도, 여전히 배 끄는 인부들에게 혹심한 육체노동을 강요하며 배를 직접 끌게 만드는 일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비단 레핀의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당대 기록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풍조였습니다. 인부들이 직접 배를 끌게 만드는 풍조가 사라진 것은, 레핀이 이 그림을 그리고도 반 세기 가까이 지난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셔였습니다.
배 끄는 인부들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찍은 1900년대 초반의 사진입니다.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과 거의 같은 모습이지요.
레핀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초췌한 형상으로 힘겹게 무거운 배를 끌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림 뒷편의 증기선과 대비되면서, 이 참혹함은 배가되지요. 증기선이 있는 시대에, 이렇게 무참할 정도로 무거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요. 그리고 레핀의 그림 덕에, 배 끄는 인부 풍조가 있었고, 그 실상이 참담했다는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게 됩니다.
워낙 인상적인 이미지를 감상자에게 던져주기에, 이 작품은 종종 '착취받는 민중 계층'을 상징하는 이미지처럼 인용되기도 합니다. 좁게는 러시아의 배 끄는 인부 제도를 묘사한 것이지만, 넓게는 러시아의 농노 제도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고, 나아가 초췌한 행색으로 착취당하는 사람들 자체를 표상하게 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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