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의 <제비 La Rondine 라 론디네>는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밝은 분위기의 작품일 겁니다. 죽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의 유일한 오페라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푸치니 오페라는 태반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으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작품도 코미디와는 거리가 멀지요. 대놓고 해피엔딩으로 끝맺는 <투란도트>에서도 시녀 류가 죽고, 남녀주인공이 맺어지는 <서부의 아가씨>도 현상수배전단이 극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분위기가 우중충합니다. 하다못해 대놓고 코미디 전개로 가는 <잔니 스키키>, 그러니까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로 유명한 그 단막극도, 남주인공 친척이 죽으면서 유언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작품입니다.
<제비>의 주요 줄거리는 <라 트라비아타>와 거의 흡사합니다. 고급 창부 코르티잔인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그 여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주인공이 등장하며, 둘은 사랑의 도피를 하고 같이 생활하지만 경제적 문제로 쪼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라 트라비아타>와 대조되게 시종일관 가벼운 분위기로 진행되다가, 경쾌한 결말을 맞습니다. 남주인공 루제로의 가족은 오페라 말미에 루제로와 여주인공 막다의 결혼을 허락하지만, 막다는 남주인공의 가족도 남주인공 루제로 본인도 자신이 코르티잔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을 허락했다는 것을 간과하지 못합니다. 막다는 루제로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한 모든 것을 고백한 후, 그래도 계속 사랑한다는 루제로와 커플로 남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루제로를 가장 사랑했지만 자신은 제비처럼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며 루제로를 남기고 코르티잔 사교계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막다에게 코르티잔이라는 직업과 코르티잔 사교계는 타락과 파멸과 불행의 근원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왔고 자신이 익숙한 세계인 것이지요.
주요 줄거리는 <라 트라비아타> 패러디라고 해도 믿을 만큼 <라 트라비아타>와 흡사하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서 막상 볼 때에는 별로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비>에서는 빈에서 유행했던 오페레타를 연상케 하는 경쾌한 선율이 연달아 펼쳐지기에 더욱 그렇지요. 애정이라는 주제를 굉장히 가볍고 경쾌하게 다룬 작품입니다. 심지어 애인이 변심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등장인물이 딱히 분노하거나 배신감에 떠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변했나? 그럼 그런 거지, 뭐." 정도의 반응만 보이지요. 자신도 가벼운 감정만을 가지고 있으니, 상대도 자길 가볍게 여기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식의 분위기지요. 푸치니의 다른 작품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등장인물들은사랑에 죽고 사랑에 살고, 배신당하면 하늘이 무너질 일로 여기는 것과 엄청나게 대조적입니다.
<제비>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단연 '도레타의 아름다운 꿈' 아리아일 것입니다. 작중에는 오페라 초반에 여주인공 막다가 연주하듯이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재산과 사랑 중에서 기쁘게 사랑을 택하겠다'라는 내용은 오페라 주제 및 여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 복선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소프라노 홍주영이 '도레타의 아름다운 꿈'을 부릅니다. 한글 자막이 달려 있습니다.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오케스트라 버전이 아니라, 피아노용으로 편곡한 피아노 반주입니다.
소프라노 아인하오 아르테타가 '도레타의 아름다운 꿈'을 부릅니다. 화질이 별로 좋지 않은 영상입니다만, 오케스트라 반주에 자막이 달린 영상이어서 일단 기재합니다. 영어 자막이 달려 있으며, 영상 30초 경부터 아리아가 시작됩니다.
소프라노 크리스틴 오폴라이스가 201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도레타의 아름다운 꿈'을 부릅니다. 푸치니가 작곡했던 오페라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됩니다. 자막은 없습니다.
'도레타의 아름다운 꿈'의 이탈리아어-한국어 대역 가사입니다. 한국어 번역 가사 출처는 네이버캐스트입니다. 클릭하면 새창으로 뜹니다.
얄궂게도 푸치니 작품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죽는 사람이 안 나오는 이 경쾌하고 밝은 작품은, 역설적으로 푸치니 작품 중 외풍에 가장 많이 시달린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이 작품이 완성된 시기는 1916년이었지만, 다음해인 1917년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이탈리아와 별다른 접점이 없는 모나코에서 비로소 초연될 수 있었지요.
1913년, 푸치니는 빈에 들렀다가 새로운 오페레타의 작곡을 의뢰받게 됩니다. 오페레타는 노래를 곁들인 연극에 가까운 개념으로, 노래는 대개 한 작품에 10곡 정도만 삽입되고 나머지는 대사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푸치니는 대본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본 전체에 노래를 붙였고, 오페레타 풍의 대본으로 오페레타로 의뢰된 <제비>는 결과적으로 빈 스타일의 오페레타와 푸치니 특유의 이탈리아 오페라풍의 스타일이 혼합된 독특한 느낌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6년 완성되었지요. 제 1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만, 이탈리아의 상황은 생존한 최고 인기 작곡가의 소품 신작을 공연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1916년 완성된 오페라를 공연하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것이었지요.
하지만 1916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국제관계는 굉장히 미묘했습니다. 적대적인 징조가 보이고 있다는 표현이 차라리 가까울 정도로요.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방어연합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협정은 처음에는 5년 기한으로 맺어졌으나, 이후 거의 자동적으로 갱신되었습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14년에도, 이 협정은 여전히 유효했지요.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삼국동맹 지도입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이탈리아 왕국 3나라가 연합을 맺은 형태입니다.
하지만 삼국 동맹에서 독일-이탈리아가 문화적 동질성 및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등을 바탕으로 강력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의 입장은 미묘했습니다. 일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서로 협조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조항이 딱히 없었지요. 당시 정황을 보면,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군사동맹이라기보다 방위 협정 정도로 여겼을 공산이 매우 높습니다.
독일에서 그려진 삼국동맹 풍자화입니다. 건장한 독일이 체격이 작은 오스트리아를 끌고 가듯이 데려가는데, 오스트리아는 수동적이긴 하지만 일단 독일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로 묘사된 이탈리아는 같이 가기 싫다고 거의 대놓고 울부짖는데, 옆에 수탉과 같이 있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수탉은 프랑스를 상징하고요. 요컨대 이탈리아는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 때문에라도 독일-오스트리아와 적극적으로 같이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는 만평으로, 이 인식은 세계 1차 대전에서 실제 현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오스트리아가 자국 황태자가 세르비아에서 암살당한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여기에 여러 유럽 국가들이 세르비아 및 오스트리아와 갖가지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뛰어들었지요. 독일 제국은 즉각 오스트리아와 행동을 같이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중립국을 표방하면서 독일-오스트리아 연합 전선에 합류하지 않았고, 1년 후인 1915년에는 영국과 런던 밀약을 맺어 독일-오스트리아의 반대편으로 참전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16년 시점에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대적하는 관계가 됩니다. 서로 적국 입장이 된 거지요.
이런 상황이었으니, 이탈리아 작곡가가 오스트리아 측의 의뢰를 받아 오스트리아에서 유행한 오페레타풍의 선율을 잔뜩 집어넣은 <제비>는 공연하기 곤란해졌습니다. 저작권 문제, 오스트리아와 얽힐 문제 등, 문제가 될 소지가 굉장히 많았지요. 결국 손초뇨 출판사가 전쟁 와중에 적국에게서 이 작품과 관련된 저작권 일체를 사들이고,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중립국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극장에서 초연하는 형식을 거친 뒤에야 <제비>는 비로소 공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런던 밀약 덕에, 이탈리아는 연합군 측으로 공식적으로 참여하며 세계 1차 대전이 종전되었을 때 승전국 대열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뒤의 이야기는 승전국 후일담이라고 하기에는 뒷맛이 씁쓸하며, 파국적인 파장을 끼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영국 등의 연합국에서는 전쟁이 한참 진핸되고 나서야 뒤늦게 참전한 이탈리아를 푸대접했고,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영국에 비하면 아주 약소한 수준의 적은 보상금과 티롤 지방만을 할당받는 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는 이런 처사에 대해 많은 불만을 품었고,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와 영국 편이 아닌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 합류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1920년대 즈음부터 이탈리아에서 군국주의 파시즘 열풍이 불었던 것도, 이 때의 불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관점이 많고요. 그래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에는 이탈리아가 패전국 대열에 서게 되었으며, 1940년 전후의 이탈리아와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대표적인 사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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